항목 ID | GC0900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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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喜之 |
영어공식명칭 | Lee Huiji |
이칭/별칭 | 사복(士復),양백(陽伯),응재(凝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부여 출신의 문인.
[가계]
이희지(李喜之)[1681~1722]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사복(士復) 또는 양백(陽伯), 호는 응재(凝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경여(李敬輿)이고, 할아버지는 이민적(李敏迪)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사명(李師命)이고, 어머니는 조현기(趙顯期)의 딸 임천 조씨(林川 趙氏)이다. 부인은 윤헌경(尹憲卿)의 딸 파평 윤씨(坡平 尹氏)이다.
[활동 사항]
이희지는 1681년(숙종 7) 부여에서 태어났다. 1717년 숙종(肅宗)이 온천에 거둥할 때 어가(御駕) 앞에 나아가 아버지 이사명의 억울함을 고하여 복관(復官)토록 하였다.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이 왕세제로 책봉된 뒤 노론 세력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추진하였으나 소론 세력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한 뒤 12월에 사헌부에서 성균관 유생이던 이희지와 유택기(兪宅基) 등에 대한 처벌을 건의하여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다.
1722년 소론 일파의 사주로 목호룡(睦虎龍)이 거짓 고변을 하였는데, 노론 측 일부 세력이 세자 시절부터 경종을 시해하려고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목호룡은 고변에서 이희지가 세자 시절 경종을 비방하는 언문(諺文) 가사를 궁중에 들이고, 궁녀에게 돈을 주며 청탁해서 독약으로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희지는 이후 국청(鞫廳)에서 조사를 받다가 장살(杖殺)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희지의 저술로는 『응재집(凝齋集)』이 있다.
[묘소]
이희지의 묘소는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에 있다. 부인 연일 정씨와의 합장묘이다.
[상훈과 추모]
이희지는 1766년(영조 46) 신원되었고, 1802년(순조 2)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