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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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景行 |
영어공식명칭 | Sin Gyeonghaeng |
이칭/별칭 | 백도(伯道),조은(釣隱),충익(忠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후기 부여 지역에서 발생한 이몽학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문신.
[가계]
신경행(辛景行)[1547~1623]의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자전(辛自全)이고, 할아버지는 신세주(辛世胄)이다. 아버지는 신질(辛垤)이고, 어머니는 영동 김씨(永同 金氏)이다. 부인은 최명강(崔命江)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경행은 1547년(명종 2)에 태어나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성균관전적·해남현감·병조정랑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인 1592년 9월 한산군수로 부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7월 홍산(鴻山)[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켜 홍산과 임천에서 군수와 현감을 사로잡은 후 청양과 예산까지 함락하고 8월 3일 홍주성[현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을 포위하였다. 신경행은 순찰사 종사관으로 홍주성에 들어가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신경행은 1597년 공주목사, 1600년 서흥부사, 1602년 군자시정에 제수되었고, 1604년에 청난공신(淸難功臣) 3등에 녹훈되고 영성군(靈城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장흥부사를 거쳐 1606년 6월 남원부사로 부임하였다. 1608년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고, 8월에는 충청도암행어사의 보고로 추고(推考)[벼슬아치의 죄와 허물을 자세히 물음]를 받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영흥부사를 지냈다. 신경행은 1623년(인조 1)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경행의 저술로 『반계시집(磻溪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묘소]
신경행의 묘소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 산3-1에 있다. 현재 ‘증평 신경행 묘소’라는 명칭으로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