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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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所-周浦 獨立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주포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정의]
1919년에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과 주포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항일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도 유호근(柳浩根)[1853~1925], 윤석봉(尹錫鳳)[1842~1910] 등이 의병에 격려문 발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윤석봉은 1906년 1월 19일 최익현을 접견하고 보령으로 돌아와 지방 유생들과 함께 ‘을사 5적에게 죄를 내리고 조약을 윤허치 말 것’을 주청하였다. 이어 재차 상소를 통하여 왜의 사령부에 잡혀 있는 선비들의 방환(放還)[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던 일]을 아뢰어 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 체결 직후 보령군 남포 지역 유림들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며 세금을 을사 5적이 있는 정부에 납부하지 말고 유회를 통하여 궁내부에 납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14년 독립의군부 충청도 대표로서 유준근(柳濬根)[1860~1920]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의 침략에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항일 활동은 보령 지역의 항일 의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경과]
김사구(金思九)[1879~1948]는 청소면 정전리에서 『매일신보』를 통하여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3월 10일경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같은 마을의 동년배 강영국(姜永國)[1878~1946]에게 독립만세운동 전개 상황을 알리면서 만세운동을 함께 전개할 것을 설득하였다. 강영국이 김사구의 설득에 찬동하면서 4월 10일 꽃놀이 개최를 핑계로 사람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두 사람은 3월 중순 이후부터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동지 규합에 매진하였다. 김사구는 독립운동에 함께하겠다고 찬동한 동지들에게 참석 약속을 어기지 않도록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첩에 각자의 서명 날인을 하도록 하는 등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4월 10일 박제건(朴齊乾)은 오후 2시경 동지 6명과 함께 만세운동의 동참을 권유하였으나 주변인들이 찬성하지 않자 끝내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김사구와 강영국이 한 달 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독립만세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4월 13일에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주포경찰관주재소 일본 경찰의 사전 탐지로 제지되었다. 당시 『매일신보』 보도에 의하면, 청소면의 이모와 웅천면의 김모 및 홍성군 광천면의 4~5명이 독립만세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보령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결과]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경 구체적으로 계획되었으나, 동지 규합에 실패하고 일본 경찰의 사전 탐지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의의와 평가]
1919년 4월 13일 주포면에서 시도하였던 독립만세운동은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보령과 홍성이 연계한 독립운동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보령군의 청소면 죽림리는 홍성군 광천면 옹암리와 인접해 있고, 광천면을 중심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즉, 보령군과 홍성면의 지역민들이 함께 독립만세를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지역 간 연계 만세운동으로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