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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08
한자 嶺南儒疏
영어의미역 Memorial to the Throne of Yeongna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진영

[정의]

조선시대 안동 지역 유생들이 집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던 집단적인 연명 상소.

[등장 배경]

16세기 이후 유학의 발달, 종법의 보급 등이 본격화하면서 각 지방에는 향교와 서원·동성마을 등이 발달하여 갔고, 이에 따라 유림과 문중의 위상 또한 높아져 갔다. 그리고 학문을 숭상하는 정치와 그에 따른 사림의 꾸준한 성장으로 지방의 유생 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유생 또는 유림은 한편으로 문과를 거쳐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생원과 진사로서 중앙의 관학과 연계되고 향교와 서원에 소속됨에 따라 교유·원유가 되어 상호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경제적 기반을 통해 향촌 사회를 영도해 나가면서 서로 연합 전선을 펴 나갈 수 있었다. 더욱이 학문적인 사승 관계와 혼인 관계는 유대 관계와 연합 전선을 더욱 강고하게 하였다.

연합 전선의 형성은 상호 통문(通文)의 유통을 빈번하게 하였고, 통문의 유통은 특히 당쟁의 격화와 더불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공론(公論)을 더욱 쉽게 형성하게 하였다. 영남의 유림은 이 통문과 공론을 통한 유생상소(儒生上疏), 즉 유소(儒疏)라는 언론 활동을 펼쳐 좀 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영남유소]

16세기 이래의 대표적인 유소로는 1565년(명종 20) 「청참보우소(請斬普雨疏)」, 1650년(효종 1) 「우율승무반대소(牛栗陞廡反對疏)」, 1666년(현종 7) 「송시열예설반대예소(宋時烈禮說反對禮疏)」 등이 있다.

「청참보우소」는 문정왕후의 위세를 업고 발호하던 승려 보우(普雨)를 척결하기 위한 유소로 소수(疏首) 김우굉(金宇宏) 등과 함께 주로 상주 지역 300여 명의 유생이 참여하였다. 「우율승무반대소」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로 소수 류직(柳㮨) 등 950여 명이 연명하였다. 「송시열예설반대예소」는 소수 류세철(柳世哲) 등 1,100여 명의 유생이 송시열의 예설을 반박한 상소이다.

[대표적인 인물]

유생상소에 참여한 소유(疏儒)의 성분은 대부분이 유학층이고, 생원·진사와 전직 관료는 아주 적었다. 연령별로는 다양한 분포를 보이나 20대와 30대가 주축을 이루었다. 「우율승무반대소」에 참여한 유생 950여 명의 거주지는 크게 안동권 575명, 상주권 172명, 경주권 87명, 진주권 36명 등이다. 안동권에서는 안동과 예안이 374명으로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안동권에서 소유의 40%를 차지하듯이 유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던 소수 또한 대부분이 안동 지역의 인물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류직(진사, 전주)과 류세철(진사, 풍산)을 비롯하여 김봉조(金奉祖, 진사, 풍산), 김시추(金是樞, 생원, 의성), 이진동(李鎭東, 유학, 진성), 이우(李禹, 유학, 한산), 이휘병(李彙炳, 유학, 진성) 등이 그들이다.

김시추의성김씨로 1621년(광해군 13)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진동은 진성이씨로 1788년(정조 12) 무신란(戊申亂) 6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창의(倡義)에 참여한 15읍의 사적을 첨부하여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이우는 1792년(정조 16) 임오의리(壬午義理)를 제기한 만인소를 올렸다. 이휘병은 1855년(철종 6) 사도세자의 참사가 있은 지 120년이 지나도록 신원이 되지 않자 영남 사림을 대표하여 사도세자 복원 만인소를 올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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