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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있는 조선 후기 권돈인(權敦仁)의 영세불망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권돈인이 수군절도사 윤영배(尹永培), 군수 오하철(吳夏哲)과 양산을 방문하여 여러 잡역들을 없애준 은덕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두 없이 비신과 비좌로 이루어져 있고, 비신은 상부가 둥글게 마름질된 원수(圓首) 형태이다. 비석의 재질은 백색 화강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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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말기 양산군수 권중은(權重殷)의 치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906년 양산군수로 부임한 권중은이 첫해부터 교화에 힘써 민속이 검소해졌고, 봉급을 덜어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세금을 감해주는 등 백성의 피폐함을 구해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오른쪽 비석군의 앞줄, 정문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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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김세호(金世鎬)와 손상일(孫相馹)의 선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869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김세호(金世鎬)와 1870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한 손상일(孫相馹)이 각각 6년과 3년의 치세 동안 외적을 물리치고 오랜 폐단을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그 혜택이 승려들에게까지 미친 것을 통도사의 승려들이 영원히 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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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군수 민종묵(閔種黙)의 송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임금의 명을 받아 양산군수로 부임한 민종묵이 민생을 포탈하는 이들을 징벌하고 바르게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게 해준 것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왼쪽 비석군의 뒷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6번째에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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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후기 박문수·김성발·황선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세불망비. 관찰사 박문수(朴文秀)와 황선(黃璿), 양산군수 김성발(金聲發), 손명대 등은 피폐해진 통도사를 위해 잡역을 면제해 주고 복구까지 시켜주었다. 이에 대해 통도사에서 그 선정을 기리고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다짐으로 비석을 세웠다. 비두 없이 비신과 비좌로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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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을 빛낸 삼조의열의 비석을 한 곳에 모아 조성한 경위를 밝힌 건립 조성 경위비. 경상남도 양산시에는 왜적에 대항한 신라의 박제상(朴提上), 고려의 김원현(金元鉉), 조선의 조영규(趙英珪) 등 삼조의열(三朝義烈)이 있으며, 이들을 추모하여 군민들이 건립한 비석들이 있다. 매년 조영규가 순절한 4월 15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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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 양산군수 손상일(孫相馹)의 영세불망비. 손상일과 관련된 비로는 양산향교 비석군에 ‘행군수손공상일청덕불망비(行郡守孫公相馹淸德不忘碑)’가 있고, 통도사 부도원 비석군에도 ‘순상국김공세호·군수손공상일영세불망비(巡相國金公世鎬·郡守孫公相馹永世不忘碑)’가 있다. 손상일이 양산군수로 부임해 와서 전답과 관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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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 비석군에 있는 양산군수 송태림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송태림(宋台霖)이 1840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편안하게 살게 한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아 비석을 세웠다.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오른쪽 비석군의 뒷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일곱 번째에 놓여 있다. 비두 없이 비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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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에 있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안근(安瑾)을 기리는 추모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군수 조영규는 동래성에서 분전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군수를 잃은 양산 백성들이 어쩔 줄을 모르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안근이 두 아들 안시명, 안이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관리로서의 직분을 다하다 생을 마친 춘추원 삼조의열(三朝義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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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조선 후기 고종 때 프랑스와 미국은 천주교 탄압과 통상 문제 등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범하여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일으킨다. 이들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이 제국주의의 통상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고, 안으로는 천주교 탄압에 대한 의지를 굳히면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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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 있는 박창과 이공미의 효자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양산군 효자조에 의하면 박창(朴暢)은 부모상을 당해 깊은 골짜기에 여막을 짓고 밤낮으로 애통해 하니 왜적도 감동하여 해치지 않아 무사히 3년상을 마쳤다. 이공미(李公美)는 어미의 무덤을 3년 동안 지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리고 세금을 면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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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 양산군수 어윤중(魚允中)의 영세불망비. 어윤중이 1874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잘살게 해준 것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칭송의 시를 지어 비석을 세웠다.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오른쪽 비석군의 앞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4번째에 놓여 있다. 비두와 비신 및 비좌로 이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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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근필(李根弼)의 영세불망비. 순찰사 이근필(李根弼)이 피폐한 고을과 통도사를 번성케 하여 백성들이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이근필은 경상도관찰사로 재직시 문란한 양안(量案)을 개조하고, 일본인들의 절영도(絶影島) 불법 체류를 막았으며, 피폐한 통도사를 부흥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비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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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조선 말기 경상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의 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883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도재는 양산 지역에 와서 청렴을 지키는 가운데 돈을 내어 둑을 쌓아 재난을 방지하는 등 공적을 쌓았다. 이를 양산 백성들이 결코 잊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비석을 세웠다.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 앞 비석군 왼쪽 비석군의 뒷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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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후기 양산군수 이발원(李發源)의 애민선정비. 이발원과 관련된 것으로 통도사 부도군에 ‘군수이후발원견역선정비(郡守李侯發源蠲役善政碑)’가, 춘추공원 내 삼조의열단 왼쪽에 ‘군후이공발원모충기적비(郡侯李公發源慕忠記蹟碑)’가 있다. 1829년 양산군수로 부임한 이발원은 세금·제방·곡물·재목 운반의 부역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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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조선 말기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고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영의정이 된 이유원이 덕치에 힘써 양산 고을 백성들이 온전히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왼쪽 비석군의 뒷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5번째에 놓여 있다. 비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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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지연(李止淵)과 이기연(李紀淵)의 공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적이 있는 우의정 이지연과 이조판서 이기연 형제가 관청에서 통도사에 부당하게 부과했던 모든 폐해를 바로잡아 준 은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비두 없이 비신과 비좌로 이루어져 있고, 비신은 상부가 둥글게 마름질된 원수(圓首)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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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 비석군에 있는 양산군수 이휘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860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한 이휘정(李彙廷)이 청렴하고 총명하여 장학 사업을 최우선으로 하고, 세금을 적게 받아 피폐한 양산을 살기 좋게 만든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백성들이 비석을 세웠다.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오른쪽 비석군의 뒷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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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말기 양산군수 장태수(張泰秀)의 덕치를 기리는 영세불망비. 1869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한 장태수는 곡식을 내어 묵정밭을 일구었고, 창고를 열어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군기를 정비하고 별포군을 기르는 등 국방에 힘썼다. 이에 따라 양산 지역이 완전한 모습이 갖추어가던 1870년 갑자기 장태수가 헌납(獻納)의 벼슬을 제수받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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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김구경 등이 징심헌의 풍광과 삶의 자세에 대하여 읊은 한시. 징심헌(澄心軒)은 박제상(朴堤上)이 양산태수로 있을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김구경(金久冏)을 필두로, 강희안(姜希顔)[1418~1465], 서거정(徐居正)[1420~1488], 김종직(金宗直)[1431~1492] 등 쟁쟁한 문사들이 시를 남겼다. 이들의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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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원진이 창포정의 모습을 보고 감회를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 창포정은 양산군수 이여익(李汝翊)[1591~?]이 관가의 창고 옆에 있는 연못 가에 건립한 것이라 전한다. 작자인 이원진(李元鎭)[1594~1665]은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동래부사로 재임할 때 「창포정 제영」을 지었다. 칠언절구의 한시이며, 1구와 2구에서는 반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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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안눌이 3년 만에 만난 승려를 천성산으로 돌려보내면서 지은 오언절구의 한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문집인 『동악집(東岳集)』에 「원적산으로 돌아가는 경일 상인을 보내며(贈別敬一上人還圓寂山)」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예부터 천성산(千聖山)은 원적산(圓寂山) 혹은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 불리었다. 이안눌의 「천성산 제영」은 전체적으로 이별의 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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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김이만이 춘설루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은 오언율시의 한시. 춘설루(春雪樓)는 조선시대 양산군(梁山郡) 관사 서쪽에 있던 누각이다. 「춘설루 제영」은 양산군수였던 김이만(金履萬)[1683~1758]이 정무(政務)를 마치고 관사 서쪽에 있던 춘설루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지은 시이다. 오언율시의 한시로서, 1구와 2구는 정무 이후 한숨을 돌린 상황을 이야기하였고, 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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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고종 15) 이만도가 춘화당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며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 「춘화당 제영」의 내용으로 보아 이만도(李晚燾)[1842~1910]가 양산군수가 된 1876년(고종 13)으로부터 2년이 지나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이다. 이 「춘화당 제영」은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자 단식으로 생을 마감했던 이만도의 애민 정신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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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안눌 등이 통도사의 모습과 주변 경관 등에 대하여 읊은 한시. 통도사는 절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시인 묵객을 불러들였으며, 이에 따라 통도사에 관한 많은 시가 남게 되었다. 시인들은 속세와 절연된 공간의 이미지를 나름의 창작력으로 살려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통도사의 맑은 이미지가 오롯이 드러나는 많은 작품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도사에 관한 시를 남긴 대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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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 비석군에 있는 조선 후기 홍재철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홍재철(洪在喆)은 1840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진심을 다해 백성을 보살펴 피폐한 고을을 개혁하였으며,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었고, 재물을 불려 국방에도 힘써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이에 홍재철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양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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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정포가 유배 중 황산강에서 읊은 칠언고시의 한시.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에 「황산가(黃山歌)」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황산강(黃山江)은 낙동강의 옛 이름이다. 작자인 정포(鄭誧)[1309~1345]가 울주(蔚州)[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유배되었을 때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포는 유배 생활 중에도 태연자약하여 활달한 장부의 기질을 잊지 않고 풍류 생활을 즐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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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정융 등이 희청헌에서의 감회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읊은 칠언율시의 한시. 희청헌(憙晴軒)은 조선시대 양산 관아의 춘설루(春雪樓) 뒤편에 있었으며, 양산군수였던 조신준(曺臣俊)[1573~?]이 지었다고 전한다. 1. 조정윤의 칠언율시 조정융(曺挺融)[1598~?]의 「희청헌 제영」은 전란을 딛고 재건한 희청헌에서의 감회를 노래하였다. 7구와 8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