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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구암면(龜岩面)은 이암방(耳巖坊) 또는 이암면(耳巖面)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이암방이 군의 북쪽 약 16.83㎞[43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이암방이 군 북쪽 약 11.78㎞[30리]에 있으며 리 18개, 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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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지역의 열녀. 본관은 도강(道康).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정황(丁熿)이고, 남편은 첨정(僉正) 권백시(權伯時)이다. 정씨는 정유재란 때에 남편을 따라 무림방(茂林坊)[지금의 순창군 구림면]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왜적이 그곳까지 추격하여 핍박을 하였다. 형세가 정절을 보전하기 어려워지자 정씨는 남편에게 “나는 이미 결정을 하였으니 그대는 부디 잘 보전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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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금동면(金洞面)은 금동방(金洞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금동방이 군의 서남쪽 약 7.85㎞[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금동방이 군 서남쪽 약 7.85㎞에 있으며 리 11개, 호구(戶口) 342호라고 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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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아동방에서 매 5일과 10일에 개설되던 전통 시장.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순창 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녹사시(綠沙市)는 아동방(阿東坊)에서 매 5일과 10일에 개설된다[綠沙市 在阿東坊 每旬五日 十日]”고 하였다. 녹사리 장터는 현재의 순창군 동계면 동심리(同心里)의 추동(秋洞) 마을 동북쪽에 있는 녹사리 장터 마을에 해당한다. 현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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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우부면에 있던 방죽. 답동 제언(畓洞堤堰)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 있던 방죽으로 답동 방축(畓洞防築)이다. 이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둘레가 240척[72.73m]이고 군의 서쪽 3리[1.18㎞]에 있다[畓洞防築 周回二百四十尺 在郡西三里]”라고 나와 있으며, 1760년(영조 36)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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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덕진면(德進面)은 덕진방(德進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덕진방이 군의 서쪽 약 3.93㎞[1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덕진방이 군 서쪽 약 3.93㎞에 있으며 리 12개, 호구(戶口) 244호라고 되어 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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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좌부면에 있던 방죽. 마근 고개 방축(亇斤古介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 있던 방죽이다. 이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둘레가 506척[153.33m]이고 군의 동쪽 5리[1.96㎞]에 있다[亇斤古介防築 周回五百六尺 在郡東五里]”라고 나와 있으며,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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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조선 시대 절. 망월사(望月寺)는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조(佛宇條)에 서룡산에 있다고 하였으나, 이후 편찬된 지리서 등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온다. 1766년 『옥천 군지』에는 망월사가 건지산 남쪽 기슭에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정확한 절터는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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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조선 시대 절. 망일사(望日寺)의 창건이나 폐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단지,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망일사는 서룡산(瑞龍山)에 있다”라고 하였고, 1766년 편찬된 『옥천 군지』나 1779년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서는 망일사가 폐사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1530년에서 17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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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 있던 조선 시대 명례궁에 전세를 내던 토지. 궁방(宮房)이란 후궁(後宮), 대군, 공주, 옹주 등의 존칭으로서 각 궁방 소속의 토지를 궁방전(宮房田) 또는 궁장토(宮庄土)라 하며, 또한 일사칠궁(一司七宮) 소속의 토지도 궁장토라 불렀다. 궁장토는 국세를 면제하였고, 경작자도 부역을 면제받았다. 이러한 궁방토는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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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목과동면(木果洞面)은 목과동방(木果洞坊)이라고도 하였으며, 줄여서 목과면(木果面) 또는 목과방(木果坊)이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월경지(越境地)로 담양(潭陽) 동촌(東村) 저동(猪洞)이 군의 남쪽 지경 목과동리(木菓洞里)에 들어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758년(영조 3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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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무림면(茂林面)은 무림방(茂林坊), 무개곡방(無介谷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무개곡방이 군 서북 약 7.85㎞[20리]라고 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 무림방이 군 서북 약 7.85㎞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745년 이후에 발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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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9월에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운북리 단풍정 마을 일대에서 일본인이 일으킨 순창군민 학살 사건.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고 일본군은 전라도 방면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전주로 향하게 되고, 일부 부대는 두 갈래로 순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한 갈래는 순창읍내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팔덕면 방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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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군 복흥방에서 매 3일과 8일에 개설되던 전통 시장. 삼치장(三峙場)이 『임원 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삼지장(三支場)으로 되어 있다.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순창 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삼치시(三峙市)는 복흥방(福興坊)의 삼치리(三峙里) 앞에서 매 3일과 8일에 개설된다[三峙市 在福興坊 三峙里前 每旬三日 八日]”고 하였다. 그러나 삼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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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상치등면(上置等面)은 치등방(置等坊) 또는 상치등방(上置等坊)이라고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치등소(置等所)가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상치등방은 군의 서북쪽 약 15.71㎞[4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176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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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금동방에 있던 방죽. 소왕 방축(蘇王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에 있던 방죽이다. 이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둘레가 350척[106.06m]이고 군의 서쪽 20리[7.85㎞]에 있다[蘇王防築 周回三百五十尺 在郡西二十里]”라고 나와 있으며,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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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 있던 기생 교육 기관. 교방(敎坊)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장악원(掌樂院)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아울러 이르던 말로 사용되었다. 좌방은 아악(雅樂)을, 우방은 속악(俗樂)을 맡아보았다. 이러한 교방은 서울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존재하였다. 교방에서는 가무(歌舞)를 담당하였으므로 이들에게 악기와 가무에 대한 교습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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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대표하는 호남정맥의 줄기에 위치한 순창군은 대부분이 산간지로 서쪽으로 회문산, 북쪽으로 강천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섬진강과 적성강 등 크고 작은 하천이 흘러 비옥한 농토가 펼쳐져 있다. 이러한 순창 지역은 판소리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고장이다. 판소리를 동편제(東便制), 서편제(西便制)로 구분하는 기준이 섬진강인데, 순창은 바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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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9월에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아미산 일대에서 일본인이 일으킨 순창군민 학살 사건.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고 일본군은 전라도 방면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전주로 향하게 되고, 일부 부대는 두 갈래로 순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한 갈래는 순창읍내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팔덕면 방면으로 들어왔다.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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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1429~1503]가 5대조이고, 아버지는 신종준(申宗准)이다. 신람(申灠)은 뜻이 높고 고상하여 효행으로 나라에서 여러 번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공명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향산(香山)에 은거하였다. 선조가 손수 ‘향산 처사(香山處士)’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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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명보(明甫), 호는 칠휴당(七休堂).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신흡이다. 신상용(申尙溶)[1577~1618]은 1577년(선조 10)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대에서 출생하였으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고 은거하여 성현의 책을 읽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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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아동곡면(阿東谷面)은 아동면(阿東面), 아동곡방(阿東谷坊), 하동(河東)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아동곡방은 군의 동북쪽 약 11.78㎞[3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도 동북쪽으로 약 11.78㎞ 떨어져 있으며 리 7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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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지역의 열녀. 남편은 양대춘(楊大春)이다. 양대춘 처 열녀 이씨는 남편이 죽은 뒤 밤낮으로 곡을 하고 3년 동안 한결같이 죽만 먹었다. 삼년상을 치른 뒤에도 생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해진 옷을 입고 쑥대 자리에서 지냈다.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가지 않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가지 않는 등 애를 태우고 슬퍼함이 남달랐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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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창의한 순창 출신의 절사.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거경(巨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할아버지는 영광 군수를 지낸 어은(漁隱) 양사형(楊士衡)[1547~1599]이고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양시매(楊時邁)이다. 양여장(楊汝樟)[1610~1656]은 1610년(광해군 2) 순창군 적성면의 귀남(龜南)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총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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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순창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정립(定立), 호는 최락당(最樂堂). 양사민(楊士敏)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여즙(楊汝楫)이고, 아버지는 증승정원 좌승지 양문거(楊文擧)이다. 양정기(楊鼎基)는 성품이 온후하고(溫厚)하고 용모가 단장(端莊)하며, 말을 하는 동안 웃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를 다하였고, 조금도 뜻을 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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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에 있던 여제를 지내던 곳. 여단(厲壇)은 의약 시설이 잘 갖추어 있지 않던 시절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거나 병이 들어 객사한 뒤 상주도 없이 외로이 구천을 헤매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위무(慰撫)하여 마을에 우환이 없게 하는 제사, 곧 여제(厲祭)를 베풀던 곳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1400년(정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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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이암방에서 매 4일과 9일에 개설되던 전통 시장.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순창 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연산시(燕山市)는 이암방(里巖坊)의 연산리(燕山里) 앞에서 매 4일과 8일에 개설된다[燕山市 在耳巖坊 燕山里前 每旬四日 八日]”고 하였다. 이때 8일은 9일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구 총수』나 1914년에 일제가 행정 구역을 개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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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오산면(鰲山面)은 오산방(鰲山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오산방은 군의 동남쪽 약 3.93㎞[1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남쪽으로 약 3.93㎞ 떨어져 있으며 리 9개, 절 1곳, 호구(戶口) 251호라고 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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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오산현(烏山縣)의 유래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옥천 군지(玉川郡誌)』[1760]의 산천조에 “오산(烏山)에 읍을 설치할 때 산의 형상이 까마귀 모양인 까닭이고, 군명(郡名)에서 오산과 옥천의 명칭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이 대립하기 이전에 있었을 것이며, 지금 향교의 주산을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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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에 편찬한 전라북도 순창군에 관한 최초의 군지이자 순창군의 인문 지리서. 『옥천 군지』는 1758년(영조 34)에 어명으로 각 지역의 지리·역사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의 소략함을 확장 보충하여, 1760년(영조 36)에 찬술을 마치고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순창군의 인문 지리서이다. 편찬자는 수정 유사(修整有司) 한치명(韓致明) 외 5인, 개간 유사(開刊有司) 권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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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와 『옥천 군지(玉川郡誌)』[1760]의 군명(郡名)에 “오산과 옥천의 명칭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이 대립하기 이전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 순창군의 서북 1리[약 0.39㎞]에 옥천동(玉川洞)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옥천현(玉川縣)의 유허이다[但烏山玉川之稱 不知在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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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우부면(右部面)은 우부(右部)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우부는 군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서쪽으로 약 0.39㎞[1리] 떨어져 있으며 리 11개, 호구(戶口) 302호라고 되어 있다. 영조 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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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덕진방에 있던 방죽. 웅치 방축(熊峙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덕천리에 있던 방죽이다. 웅치 방축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에는 “웅치 방축은 둘레가 370척이며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熊峙防築 周回三百七十尺 在郡西十里]”라고 하였으며,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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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무림방에 있던 방죽. 율곡 방축(栗谷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운북리에 있던 방죽이다. 율곡 방축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에는 “율곡 방축 둘레가 392척이며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栗谷防築 周回三百九十二尺 在北三十里]”라고 하였으며,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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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서 매 1일과 6일에 개설되던 전통 시장.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순창 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읍시(邑市)는 매 1일과 6일에 개설된다[邑市 每旬一日 六日]”고 하였다.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순창군 지도』에는 좌부면 하전리(下前里)와 남원으로 이어지는 다리 중간에 장시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좌부면 하전리에 읍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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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에 있던 창고. 『대동지지(大東地志)』 창고조에 “창(倉)이 5개인데 모두 군내에 있다. 성창(城倉)은 서쪽 30리[약 11.78㎞] 담양 금성 산성에 있고, 사창(社倉)은 서쪽 50리[약 19.64㎞] 상치등면에 있다[倉五(皆郡內) 城倉(西三十里潭陽金城山城) 社倉(西五十里上置等面)]”라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순창군 창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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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9월에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일대에서 일본인이 일으킨 순창군민 학살 사건.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고 일본군은 전라도 방면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다.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전주로 향하게 되고, 일부 부대는 두 갈래로 순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한 갈래는 순창읍내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팔덕면 방면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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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인화면(仁化面)은 잉화벌방(仍火伐坊) 또는 인화벌면(仍火伐面)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잉화벌방이 군의 동북쪽 약 3.93㎞[10리]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동북쪽으로 약 5.89㎞[15리] 떨어져 있으며 리 6개, 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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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1598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전라북도 순창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일본군은 각지의 의병과 명나라 지원군, 또 이순신(李舜臣)에 의한 해로 통제 등으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듬해 4월부터 조선과 화의가 오가게 되다가 6월 일본군은 철수를 하였다. 그러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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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방에 있던 방죽. 자포곡 방축(雌抱谷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자포실 마을에 있던 방죽이다. 자포곡 방축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에는 “자포곡 제언은 둘레가 295척이며, 군의 북쪽 복흥방(福興坊)에 있다[雌抱谷堤堰 周回二百九十五尺 在郡北福興坊]”라고 하였으며, 1760년(영조 36)에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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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품곡방에 있던 방죽. 점어곡 방축(鮎魚谷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용내리(龍內里) 보내 마을에 있는 방죽이다. 이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둘레가 319척[96.67m]이며, 군의 남쪽 10리[3.93㎞]에 있다[鮎魚谷防築 周回三百十九尺 在郡南十里]”라고 나와 있으며, 1760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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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지역의 효자. 정시현(鄭時賢)[1598~1685]은 1598년(선조 31) 출생하였는데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늙어 이가 다 빠지자 정시현은 부인 이씨를 시켜 젖을 드리도록 하였는데, 노망이 든 아버지가 이따금 며느리더러 어머니라 부르기도 하였다. 나이 60세에 부모의 상을 당하자 죽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치렀다. 고을 사또 윤종지(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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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순창 지역의 효자. 본관은 옥천(玉川). 자는 원서(圓瑞), 호는 모헌(慕軒). 증조할아버지는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조원길(趙元吉)이고, 할아버지는 무과를 거쳐 보공장군(保功將軍)·절제도위(節制都尉)에 이른 조염(趙琰)이다. 조방(趙方)은 어머니가 병이 들자 변을 맛보아 가면서 치료하였다. 어머니 병이 심해져 소의 간을 먹고자 하였으나 구할 수 없어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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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순창에서 후진을 양성한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길부(吉夫), 호는 송은(松隱). 할아버지는 조득현(曺得賢), 아버지는 조곤하(曺袞河)이다. 아들은 동래 부사를 지낸 조희(曺禧)이다. 조숙덕(曺淑德)[1459~1519]은 1459년(세조 5) 전라남도 담양군 운제에서 출생하였다.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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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순창 출신의 의병. 본관은 옥천(玉川). 자는 사홍(士弘), 호는 모충재(慕忠齋). 7대조 할아버지는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조원길(趙元吉)이며, 아버지는 참봉(參奉) 조응견(曺應堅)이다. 조여관(趙汝寬)은 1557년(명종 12) 순창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으며, 1577년(선조 10) 20세 때에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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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좌부면(左部面)은 좌부방(左部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좌부(左部)가 군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읍내에 있으며 리 8개, 호구(戶口) 715호라고 되어 있다. 영조 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좌부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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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방에 있던 방죽. 지내 방축(池內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赤城面) 고원리(古院里) 지내(池內) 마을에 있는 방죽이다. 이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둘레가 734척[222.42m]이며 적성진의 서쪽에 있다[池內防築 周回七百三十四尺 在亦城津西]”라고 나와 있으며, 1760년(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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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오산방에 있던 방죽. 지산 방축(池山防築)은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한내리(閑內里) 지내(池內) 마을에 있는 방죽이다. 이에 대해서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둘레는 510척이며 오산방(鰲山坊)에 있다[154.55m][池山防築 周回五百十尺 在鰲山坊]”라고 나와 있다.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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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창신리에 있던 교통·통신을 담당한 역. 역은 역관(驛館), 역참(驛站), 우역(郵驛) 등 다양하게 불리며 중국의 역전 제도(驛傳制度)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된다. 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에서 우역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도 존재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역제를 이어받아 본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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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팔등면(八等面)은 팔등방(八等坊), 팔등리방(八等里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팔등리방이 군의 서북쪽 약 3.93㎞[10리]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팔등방이 군의 서북쪽 약 3.93㎞에 있으며 리 6개, 호구(戶口)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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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품곡면(品谷面)은 품곡방(品谷坊), 풍남면(豊南面)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품곡방이 군의 남쪽 약 5.89㎞[15리]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품곡방이 군의 서남쪽 약 5.89㎞에 있으며 리 12개, 호구(戶口) 333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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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 피노리에서 매 2일과 7일에 개설되던 전통 시장. 1760년(영조 36)에 발간된 『순창 군지(淳昌郡誌)』에 의하면 “피노리장은 군의 동북쪽 30리 피노리(避老里) 앞에서 매 2일과 7일에 개설된다[避老里市 在郡東北三十里 避老里前 每旬二日 七日]”고 하였다. 피노리는 하치등면(下置等面)에 속하였던 곳이며, 이곳은 지금의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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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하치등면(下置等面)은 하치등방(下置等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하치등방이 군의 북쪽 약 23.56㎞[60리]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하치등방이 군의 북쪽 약 23.56㎞에 있으며 리 18개, 절 3곳, 호구 550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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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효자.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갖바치[皮工]였다. 한해오(韓海悟)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즐기시는 음식을 정성껏 마련해 올리고 떨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묘소가 약 8㎞ 밖에 있었음에도 날마다 가서 곡을 하고 비바람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신위를 방에 모시고는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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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호계면(虎溪面)은 호계방(虎溪坊) 또는 범지방(凡只坊)이라고도 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범지방이라고 하였으며, 군의 북쪽 약 9.82㎞[25리]에 있다고 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호계방이 군의 북쪽 약 7.85㎞[20리]에 있으며 리 1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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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순창 지역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 효자로 이름이 난 홍축(洪舳)의 후손이다. 선조 중에는 현감을 지낸 이도 있어 신분은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해(洪楷)는 타고난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도와 우애가 깊었으며, 온화하고 어질며, 공손하고 검소한 덕이 있다고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집안의 어른들을 잘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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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신상용의 정려. 신상용(申尙溶)[1577~1618]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칠휴당(七休堂),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선전(宣傳) 신흡(申洽)의 아들로 순창 남산대(南山坮)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생선을 먹고자 하니 한겨울에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어 잉어를 잡아 아버지에게 드렸다. 이 같은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