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김씨 김담(金譚), 아들 김경황(金景滉)·김경시(金景時) 형제, 손자 김한(金垾) 등 삼세사효자의 행실을 기록한 글. 김담, 김경황·김경시, 김한 등은 강릉김씨로 3대에 걸쳐 4명의 효자였다. 이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삼세사효자(三世四孝子)의 행실을 기록하여 정려각에 걸었다. 송시열이 관동지역을 유람하면서 강릉에서 삼세사효자의 효행을...
-
강릉명륜서원(明倫書院)의 중수 사실을 기술한 기문. 강릉명륜서원은 일명 향현사이다. 향현사(鄕賢祠)는 강릉향교 내 화부산 기슭에 있는 사우로 강릉 출신 12명의 향현을 배향한 곳이다. 1990년 강릉 향현사를 중수하면서 최덕철(崔德澈)이 작성하였다. 화부산 기슭에 위치한 강릉 향현사의 자연 환경, 연혁 그리고 중수 사실을 기술하였다. 특히 중수 시...
-
충열공 박제상의 행적을 기록하고 가치를 평가한 글. 관설당은 신라시대 눌지왕 시절의 충신인 대아찬 박제상(朴堤上)[363~419]이다. 조선시대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1566년에 신라시대 충신으로 이름난 박세상의 충렬을 기리며 쓴 서(序) 형식의 문학작품이다. 이 글은 박제상의 후예들이 그의 행적과 충렬의 실제 일들을 기록...
-
1935년 강릉향교의 교제(校制)를 정비하면서 작성한 기문. 1935년 강릉향교 직원(直員)[현재의 전교(典校)] 박원동(朴元東) 등이 다른 지역 향교를 방문하고서 교제(校制) 즉 위패의 봉안, 석전제 봉행, 제복(祭服) 및 제기(祭器)의 준비와 보관 등에 관한 일들을 살펴본 후 강릉향교에 이를 적용하면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교제수비기(校制修備記)」에는 강릉향교의...
-
강릉시 저동 소재 금란정(金蘭亭) 건립 내력을 적은 기문. 금란정은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의 계회 모임 장소로 활용되는 정자로 경포대 북쪽 호숫가에 있다. 「금란정실기(金蘭亭實記)」는 계원 심철한(沈哲漢)이 작성한 것으로 이 정자의 매입과 중수 내용을 한문으로 적어 정자에 걸어놓았다. 크기는 가로 77㎝. 세로 31㎝이고 나무로 만든 현판이다. 옛날 백연당(百...
-
17세기 초 강릉 지방 재지사족들이 풍속을 준수하기 위한 만든 조항. 조선중기의 강릉 지역에서 지방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향리의 풍속을 바로잡고 유교적 윤리규범의 확산과 진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구체적 절목을 명시한 금문(禁文)을 작성하였다. 정경세는 1614년(광해군 6) 강릉부사로 재직하면서 「통유문급절목(通諭文及節目)」을 발표하였다. 강릉부의 혼인...
-
강릉시 연곡면 행정리에 있던 강릉김씨의 정려각을 강릉시 대전동 선영 인근으로 이건한 사실을 기록한 기문. 절부 강릉김씨의 열녀각은 원래 강릉시 연곡면 행정리에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마모가 심해지고 또 도로 개설로 인해 이건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족인들은 이건을 논의하여 선영에 있는 강릉시 대전동 소재 문토 인근 대로변에 정려각을 이건하고 그 이건 사실을 정리하...
-
우복(愚伏) 정경세[1563-1633]가 세운 강릉향교 권학비를 1933년 재건립하면서 작성한 기문.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우복 정경세가 학문의 권면과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세운 권학비문이 낡고 오래되어 소멸되어가는 것을 일제 강점기에 강릉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새로이 제작하여 세웠다. 1932년 가을 최재하(崔在河) 등이 우복 정경세가 세운 권학흥교비(勸學興敎...
-
삼가 박수량 전사청인 오사재(五思齋)를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글.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 소재 전사청인 오사재는 1931년 족인들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현재까지 전사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고, 주위는 토담이 둘러져 있다. 재실 중앙과 우측은 마루바닥이며, 좌측은 온돌이 설치된 방으로 만들어졌다. 내부에는 현판,...
-
효자 김담(金譚)의 행적과 효행을 찬(撰)한 서문(序文). 「서김효자행실(序金孝子行實)」은 원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지어 현판에 새겨 걸었는데, 훼손되자 1933년 13세손 김익성(金益成)이 다시 새겨 걸었다. 현판은 가로 96㎝, 세로 29㎝이다. 봉래 양사언이 김담의 효행을 칭찬하고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서술하였다. 김효자의 효행을 먼저 기록한 후...
-
강릉향교(江陵鄕校) 대성전(大聖殿) 서까래, 제기고(祭器庫), 취반소(炊飯所)의 중수 내력을 적은 기문 1864년(고종 4) 강릉향교 도유사(都有司) 유난(柳暖), 이선화(李璿和), 이윤홍(李允鴻), 손동학(孫東學) 등이 대성전을 비롯한 부속건물이 오래되어 훼손되고 비가 새자 이를 중수하면서 그 중수과정을 적었다. 중수 사유, 중수를 위한 향교에서의 논의 내용, 중수 담...
-
송담서원 직실(直室)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문. 다례 준비와 유생들의 강학을 위한 장소로 직실이 건립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이를 안타까워 하던 차에 박용규(朴容圭)·최벽규(崔璧圭) 등이 직실을 비롯한 서원 건물을 지킨 사실을 1953년 김영기(金永起)가 기록하였다. 서원의 건물 중에는 직실이 있는 까닭과 의미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
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 김몽상의 처 강릉김씨, 김석진(金錫晋), 김석진 처 강릉최씨, 김구(金坵) 등 삼세삼효이열(三世三孝二烈)의 효열 행적을 기록한 정려 기문. 「안동김씨 삼효이녀려기(安東金氏三孝二女閭記)」는 강릉시 교2동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각(三世三孝二烈之閣)" 안에 있다. 제목은 '효열각 행적기(孝烈閣行蹟記)'이다. 이 효열각 행적기는 1807년...
-
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 김몽상의 처 강릉김씨, 김석진(金錫晋), 김석진 처 강릉최씨, 김구(金坵) 등 삼세삼효이열지려각(三世三孝二烈之閭閣)의 중수 사실을 적은 기문. 「안동김씨효열각중수기(安東金氏孝烈閣重修記)」는 강릉시 교2동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각(三世三孝二烈之閣) 안에 있다. 「안동김씨효열각중수기」는 1941년 8세손 김재남(金在南)이 짓고, 김재익(...
-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소재 옥천정(玉泉亭)에 있는 상량문(上樑文). 옥천정은 1969년 4월 10일 최진홍(崔鎭洪), 정달화(鄭達和) 등 강릉시 옥계면 천남리 주민 50여 명이 정자계를 조직하여 협동으로 건립하였다. 옥천정에는 가남(可南) 최상덕(崔相德)이 쓴 「옥천정기(玉泉亭記)」[28.5×27㎝]와 상량문(上樑文)[112.5×24㎝]을 비롯해서 12개의 기...
-
심언광(沈彦光)의 제향을 위한 증양재(甑陽齋)의 내력을 적은 기문. 삼척심씨 어촌공(漁村公) 종중 소유의 증양재[강릉시 난곡동 36번지 소재]는 어촌공을 비롯한 선조를 숭모하고 묘소관리 및 일기불순시 묘제를 대신하여 제(祭)를 올리기 위해 지어진 재실로 문중 재산으로 운영되며 제향일은 매년 음력 9월 20일이다. 1958년 후손 심의섭(沈儀燮)이 「증양재기문」...
-
강릉김씨 한림공파 관련 아홉 인물들의 위패를 창덕사(彰德祠)에 봉안하며 기록한 기문(記文). 강릉김씨 한림공파 후손들은 1965년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강릉시 홍제동에 창덕사를 창건하고 선조 9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994년 도시계획으로 사우를 현재의 위치인 강릉시 운정길 107-11[운정동 292번지]로 이건하면서 9명의 위패도 함께 옮겨 봉...
-
추감재 중수 사실을 적은 기문. 강릉시 강릉대로457번길 84-3[포남2동 389번지] 운곡동에 있는 추감재는 강릉최씨[필달계] 용연동파(龍淵洞派) 운곡상(雲谷上) 문중 소유로 1876년(고종 13) 6월에 건립되었다. 최충일(崔忠一)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횡성고씨(橫城高氏), 최충일의 아들 최문급(崔文汲), 증손 최중채(崔重采), 5대손 최창혁(崔昌爀)...
-
강릉부에 부임하였던 역대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관원 명부. 관원의 진퇴지적(進退之蹟)을 기록하여 권과(權課)의 규범으로 삼고자 관아에서 간행한 것이다. 필사본이며 8행에 각행 20자이다. 크기는 가로 29.7㎝, 세로 41.7㎝이다. 4침(針) 선장(線裝)이다. 신라 이사부(異斯夫)부터 역대 강릉부에 부임한 관원의 부임시기와 퇴임...
-
강릉시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고 강릉문화원에서 발간한 시지. 『강릉시사(江陵市史)』는 1996년 강릉시사편찬위원회에서 그간 정리되지 않았던 지역관련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을 총망라한 관찬읍지 형태로 발간된 책이다. 1975년 임영지증보발간위원회에서 『임영(강릉·명주)지(臨瀛(江陵·溟洲)誌)』를 간행한 이후 강릉시 전반에 관한 역사서 또는 지리지가 필요하다는 인식하...
-
강릉최씨 삼현(三賢)으로 불리는 최치운(崔致雲), 최응현(崔應賢), 최수성(崔壽峸)의 행적을 기록한 유고집(遺稿集).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1390~1440]은 1417년(태종 17)에 사마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아들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1428~1507]은 1454년(단종 2)에 생원으로 문과에 합격하였다. 최응현의 손자인 원정(猿亭) 최수...
-
1930년대 이전 강릉 향교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기록한 책. 강릉 향교의 건립으로부터 1932년까지의 향교 활동사항을 정리한 책이다. 가로 19㎝, 세로 26㎝ 크기의 활자본으로 강릉 고적 보존회(江陵古蹟保存會)에서 1933년 11월 발행하였다. 발행인은 당시 강릉 군수였던 일본인 다키자와 마코토[瀧澤誠]와 김병환(金秉煥), 박원동(朴元東) 등이었다....
-
강릉 향교의 사적을 기록한 책. 1996년 강릉 향교에서 강릉 향교 건립 내력 및 연혁, 성균관, 강릉 유도회, 명륜 교육원, 강릉지방 서원, 명륜 중·고등학교 등에 관한 사항을 정리·기록하였다. 『강릉향교지』는 총 1051쪽으로 1996년 강릉 향교에서 간행하였다. 신평묵(辛平黙)이 편찬 위원장을 맡아 주관하였고 전교(典校) 김시진(金是振)이 발간사를 썼다....
-
1894년 9월부터 1895년 3월까지 강원 영동지방 각 읍에서 펼쳐진 동학농민군 토벌과 관련된 사항을 정리·기록한 고서. 저자는 미상이며, 필사본이다. 지질은 한지이고, 면수는 254면이다. 소장처는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이다. 『동비토록(東匪討錄)』의 ‘동비’는 관군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을 지칭한 표현이다. 상급관청과 하급관청 그리고 각 군진(軍陣)과 주고받은...
-
강릉의 유학자 심일수(沈一洙)의 문집. 심일수[1877~1952]의 호는 둔호(遯湖)이며,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의 13세손이다. 『둔호유고』는 심일수가 남긴 글을 손자 심홍섭(沈弘燮)이 모아서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총 92면이며, 황지(黃紙)로 5침(針) 선장(線裝)이다. 1961년 강릉시 성내동 9번지 소재 경강문화사(京江文化社)에서 인쇄하였으며,...
-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의 행적을 기록한 문집. 박수량은 1475년(성종 7) 출생하여 1504년 사마시에 입격하고 연산군 때 단상법(短喪法)에 반대하며 3년상을 치른 것으로 인해 살아서 정려를 받았던 효자이다.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어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낙향하여 향풍 진작에 기여하다가 1546년(명종 2) 사망하였다....
-
시호(詩湖) 박원동(朴元東)의 문집. 박원동[1873~1949]의 자는 덕영(德英), 호는 시호(詩湖)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안변학교(安邊學校) 교원으로 재직하였으며 귀향하여 면장을 지냈다. 또한 풍호정(楓湖亭)을 짓고 시풍을 즐겼다. 1932년부터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를 편찬하여 발간하였고 『강릉향교실기(江陵鄕校實記)』...
-
1777년(정조 1)부터 1782년(정조 6)까지 강릉에서 발생한 하남재의 서원화 추진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문건을 필사한 고서. 2책이며, 필사본으로 필사자와 필사 시기는 미상이다. 삼척심씨들은 1778년(정조 2)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 주자 영정을 모셔와 하남영당에 봉안하고 하남영당의 서원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1777년 강릉 지방 유생들은 하남재는 어촌...
-
1932년~1933년경 강릉 출신 사회주의 민족 운동가들이 추진한 고려공산당 재건 활동. 강릉지역 공산당원들이 강릉 고려공산당[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강릉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고, 강릉적색농민조합원들은 고려공산당 재건을 주도하였다. 강릉청년회, 강릉농민동맹, 신간회 강릉공산청년동맹, 고려공산당 재건 동맹 참여 인물들이 1932~1933년 고려공산...
-
강릉 향현사의 건립 내력과 연원을 적은 비석. 강릉명륜서원은 향현사를 말한다. 향현사는 조선조 강릉 지방 출신 12명의 인물을 향현으로 추배한 사우이다. 강릉명륜서원묘정비(江陵明倫書院廟庭碑)에는 향현사 연혁 등이 기술되어 있다. 향현사는 고종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다시 옛터에 중건하였다. 중건하면서 명륜서원이라 불렀고 묘정비도 세웠다. 이 묘...
-
강원도 강릉시 보현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시대의 목조보살좌상과 복장유물. 고려 시대 제작된 불상으로 제작 시기는 복장 다라니 조성 연대인 1292년(충렬왕 18) 보다 앞선 11~12세기로 추정된다. 2015년 3월 16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되었다. 강릉 보현사 목조보살좌상은 목재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 금칠을 하여 화려하다. 세장형의 신체...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에 소장되어 있는 아미타 삼존불 좌상과 복장 유물. 2013년 1월 11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된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불상 3구와 복장(腹藏) 유물 1점이다. 보현사는 지장사(地藏寺)라고도 하는데, 650년(신라 진덕 여왕 4)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신라 하대 경애왕 대에 범일 선사(梵日 禪師)의 제...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보현사에 소장되어 있는 흙으로 빚은 보살 좌상. 2013년 1월 11일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53호 지정된 강릉 보현사 소조보살좌상은 흙을 주재료로 하였으며, 현재 보현사에 소장되어 있다. 보현사는 지장사(地藏寺)라고도 하는데, 650년(신라 진덕 여왕 4)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신라 하대 경애왕 대에 범일 선사(梵日 禪師)의 제자인...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용연사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관음보살 좌상. 2007년 1월 19일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41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조 관음보살 좌상 1구가 있다.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용연 계곡에 위치한 용연사는 1650년(효종 1) 옥잠(玉岑)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왕침 대사(王葴 大師)가 응봉산 동쪽 용연동...
-
일제 강점기 강릉군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 단체. 강릉 청년 동맹은 1920년대 강릉 지역 청년 운동이 분산적·파벌적·분국적(分的局) 양상을 띠자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통일된 청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강릉 청년 운동을 주도하였던 강릉 청년회의 조직과 활동이 유명무실해지자 1927년 11월 19일 강릉 청년회를 해체하고 김재진(金在軫)...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청학사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 광배, 중대석 편. 2011년 8월 12일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52호로 지정된 강릉 청학사 소장 석불 좌상·광배 및 중대석은 강릉시 구정면 청파로 176-38[구정리 29] 청학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청학사가 보관하고 있는 이 유물들은 원래 청학사에서 남서쪽으로 약 2㎞ 쯤 더 들어가면 있는 흑암사(黑岩寺)라...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청학사에 소장되어 있는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보살 입상. 강릉 청학사 소장 청동 보살 입상은 2007년 1월 19일 강원도 문화재 자료 143호로 지정되었으며, 강릉시 구정면 청파로 176-38[구정리 29] 청학사에 보관되어 있다. 청학사가 이 유물을 소장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한 스님이 청학사 가까이에 있...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청학사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 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불 입상. 2007년 1월 19일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142호로 지정된 청동 여래 입상으로 현재 강릉시 구정면 청파로 176-38[구정리 29] 청학사에 보관되어 있다. 청학사가 이 유물을 소장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한 스님이 청학사 가까이에 있는 폐사지인 흑암사 터에 작은...
-
강릉 향교 대성전에서 매년 봄·가을에 지내는 제례 석전제(釋奠祭)는 강릉 유도회 주관으로 2월 상정일[음력 2월 1일]과 8월 상정일[음력 8월 1일]에 강릉 향교 대성전과 동재·서재에 모신 중국 선현 118위와 한국 선현 18위에 지내는 유교 제례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제례를 시행하는 연유는 『예기』의 제례법에 천도(天道)를 합하여 봄에 체제(禘祭)를...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는 곽경(郭鏡)으로 송나라 관서 홍농(弘農) 지방의 명문가 후예였다. 1133년(고려 인종 11)에 고려에 건너와 정착하였다. 11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평장사, 문하시중 등의 관직을 거쳤고, 이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작위와 함께 포산군(苞山君)에 책봉되었다. 강릉 입향시조는 곽경의 13세손인 곽거완(郭居完)이다....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김주원이 787년에 당시 북빈경(北濱京)이었던 강릉으로 옮겨 명주 지역 9군(郡) 25현(縣)을 관장하는 명주군왕에 책봉된 이래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세습하면서 형성되었다. 김주원은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6세손이다. 785년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신하들은 무열왕계의 직계인 김주...
-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시조인 김경생(金慶生)의 비. 김경생은 1326년(고려 충숙왕 13)에 출생하여 조선조에 종3품 중직대부(中直大夫)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냈고, 부인은 숙인(淑人) 강릉최씨로 판서 육성군 최안호(崔安灝)의 딸이다. 둘째 부인은 숙인(淑人) 삼척심씨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을 지낸 삼척심씨 시조 심동로(沈東老)의 딸이다....
-
1389년부터 1895년까지의 강릉 읍격. 1389년(공양왕 원년), 강원 영동 지방의 행정적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강원 영동의 거진(巨鎭)의 의미로 강릉대도호부로 읍격을 정하였다. 조선 개국 후 군현제 개편 시에도 강릉 대도호부의 읍격을 유지하였다. 특히 여말 선초의 전환기에 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김광을(金光乙), 함전림(咸傳霖) 등의 출사와 고려 초에 왕씨 성을 사성받았던 세력...
-
조선시대 강릉대도호부 내의 최고 관장(官長). 강릉은 하슬라(何瑟羅), 하서량(河西良)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선덕왕(善德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으로 편제되었으며, 성종(成宗) 2년에 하서부(何西府), 동왕 5년에 명주 도독부(溟州都督府), 동왕 11년에 명주목(溟州牧),...
-
신라왕 박혁거세(朴爀居世)의 후손인 박순(朴純)이 1200년대에 강릉에 정착한 이후 누대에 걸쳐 세거한 박씨. 박씨는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40여 개의 본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중 박혁거세의 4세손 파사왕의 후손인 박순이 1200년대 강릉으로 이주한 이후 그 후손들이 대대를 이어 강릉 지역에 살면서 대성(大姓)을 이루었으며, 『세종실록...
-
1920년대 강릉 포교당 내에서 조직된 강릉 지역 불교 여자 청년 단체. 강릉불교여자청년회는 강릉 포교당을 중심으로 여성 불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청년 단체로 지역 사회 봉사, 생활 개선을 위한 토론회 개최, 여성계에 대한 계몽 활동 등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설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며, 192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 1927년 5월 22일 강릉불교여자청...
-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61번지에 있는 강원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된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은행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암·수꽃이 따로 피는 암수딴그루의 나무인데, 강릉 옥천동 은행나무는 수나무로서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강릉의 명목(名木)이며 신목(神木)으로 관리되고 있다. 1993년 12월 23일 강원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의 한 사냥...
-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용연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삼층 석탑.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용연 계곡에 위치한 용연사는 1650년(효종 1) 옥잠(玉岑)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왕침 대사(王葴 大師)가 응봉산 동쪽 용연동 만월산에 건립하였다고도 한다.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이후 비구승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재는 조계종 오대산 월정사 교구 관...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강릉유씨 시조 유전(劉荃)은 송나라 인종 때 도학과 문장에 뛰어나서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한림학사를 지냈다. 고려 문종 때 팔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 와 이단을 배척하고 유학을 천명하였으며 선성 및 72현의 상(像)을 국자감에 봉안케 하였다. 충렬왕 때 문양(文襄)의 시호를 받았다.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개...
-
일제 강점기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계열의 농민 단체. 강릉적색농민조합(江陵 赤色 農民 組合)은 이미 강릉 지역에서 결성된 강릉 공산 청년 동맹[1932년 2월 결성], 조선 공산당 공작(工作) 강릉 위원회[1932년 4월 10일 결성], 강릉 반제(反帝) 그룹[1932년 6월 상순 결성] 등과 같은 비밀 사회단체와 함께 기관지 발행, 각종 기념 투쟁, 프...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 청학사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석조 관음보살 좌상과 복장 유물. 2007년 1월 19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된 청학사 소장 석조 관음보살 좌상과 복장 유물로 제작 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청학사는 원래 옛날 주지가 1970년대 초 흑암사 터로 추정되는 지역에 ‘흑암사(黑岩寺)’라는 작은 암자를 지어 수행하던 절을 현...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강릉최씨 문한계(文漢系)의 시조는 최문한이다. 최문한의 조부 최전(崔佃)은 중국 노릉길수현(盧陵吉水縣)에서 태어나 송나라 이종(理宗)의 딸 경희공주(敬禧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당시 남송은 이미 국운이 쇠하였다. 최전은 문천상(文天祥) 등과 더불어 송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경희공주와 함께 바다...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경주최씨상계세보』에 의하면 강릉최씨 시조 최필달은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후예로 전해지나 정확히 고증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필달은 고려 초기에 경주최씨에서 분적(分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필달은 고려 초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중대광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重大匡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이 되었으며, 영첨의좌정승...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는 최흔봉(崔欣奉)으로 고려 태조의 부마가 되어 대경(大卿)을 지냈다. 입향시조 최입지는 최흔봉의 12세손이며 산수재(山水齋) 최릉(崔陵)의 아들로 1275년(충렬왕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부원군(江陵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강릉을 관향으로 삼았다. 후손들이 평장사(平章事)를 연이어 하였다고 하여 평장최씨라고 하기도 한다....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강릉 최씨 동원군의 종갓집.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신리천로 196-6[교항리 998]에 있다. 주문진 종합 터미널 부근 국도 7호선에서 서쪽 장덕리 방향 1㎞ 지점에 위치한다. 일제 강점기인 1918~1919년에 지어진 강릉 최씨 동원군 종택으로, 2011년 1월 단장 복원 공사가 추진되었다. 안채, 사랑채...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함혁(咸赫)은 당나라에서 병부상서평장사(兵部尙書平章事)를 지냈는데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인물이다. 『경주이씨세보(慶州李氏世譜)』에 의하면, 진한(辰韓) 초기 알평(謁平)이 경주 표암봉(瓢岩峰) 밑에서 구봉(鳩峰) 함혁(咸赫)과 함께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함혁은 이후 양근자사(楊根刺史)가 되어 양평군 고읍면 용천리 용...
-
강원도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에 위치한 누각. 호해정은 현재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호해정은 당초 현감(縣監) 김지(金輊)의 후손 습독공(習讀公) 김계운(金繼雲)이 창건하였고, 습독공은 후손이 없자 큰사위인 별감(別監) 장호(張昊)에게 증여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장별감은 자신의 호를 따서‘태허정(太虛亭)’이라 정자명...
-
조선 중종 때 강릉 사람인 효자 김덕장(金德璋)의 효행을 적은 효자비. 이 비석은 조선 중종 때 강릉 사람 김덕장(金德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웠다. 김덕장은 어릴 적부터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살던 중, 하루는 산불이 나서 묘소에까지 이르자 통곡하며 하늘에 비니 돌연 비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
강원도 강릉시 강문동 경포대 현대 호텔 신축 부지 내에서 발굴·조사된 신라 시대의 토성 터. 강문동 신라 토성 터는 강릉시 강문동 265번지 일명 죽도봉(竹島峰) 일대 경포대 현대 호텔 신축 부지 내에서 발굴 조사되었다. 2011년 경포대 현대 호텔 신축을 위한 사업 시행을 목적으로 실시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지로 토성이 위치한 죽도봉은...
-
1688년(숙종 14)부터 1692년(숙종 19)까지, 1728년(영조 4)부터 1738년(영조 14)까지 불렸던 강원도의 옛날 이름. 조선시대에 강상죄가 발생한 지방의 경우 읍호를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 반대로 왕실이나 국가와 관련하여 경사스러운 사안이 발생하면 읍호를 승격시켜주었다. 강원도는 조선조에 역적의 출생지라 하여 일시적으로 강춘도(江春道), 강양도(江襄道),...
-
고려 초기 명주[지금의 강릉] 출신의 고승. 자는 혜일(慧日), 법명은 결응(決凝). 성은 김씨, 증조할아버지는 명주 호족 김영길(金英吉)이고 할아버지는 김선희(金善熙)로 장보(章保)·기연(器璉)·굉홍(宏洪)의 관직을 지냈다. 아버지는 김광률(金光律)로 금곡경(金穀卿)을 지냈다. 어머니는 강릉 군부인(江陵郡夫人) 방씨(方氏)로 내의령(內議令) 강명(康明)의 딸이다. 결응...
-
교리(校理) 곽거완(郭居完)을 추모하기 위해 1972년에 건립된 사당(祠堂). 사천면 노동리에서 운전면허시험장으로 향하는 도로 우측 산기슭에 위치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벽돌담이 쌓아져 있다. 태극모양과 연화문으로 단청된 솟을대문에는 ‘입덕문(入德門)’이란 현액과 봉안문(奉安文)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 우측에는 경덕사기적비가 있다. 1972...
-
조선전기 교리 곽거완(郭居完)을 모신 경덕사(景德祠) 사적을 적은 비 강릉시 사천면 노동상리에 있는 경덕사는 곽거완의 후손들이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2년에 신축되었다. 사우 신축과 더불어 지역 사림들에 의해 위패가 봉안됨에 따라 매년 음력 2월 23일에 다례(茶禮)를 거행한다. 곽거완(郭居完)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 출신이다. 1399년(정종 1)에 생...
-
칠봉(七峯) 함헌(咸軒)을 제향하기 위한 재사(齋舍). 강릉함씨(江陵咸氏) 칠봉댁(七峰宅) 종중에서는 매년 음력 9월 20일 묘소와 재사에서 제향한다. 강릉부사 화교(華嶠) 조명하(趙命夏)가 쓴 「경모재사기(敬慕齋舍記)」에 의하면, 함헌의 행적과 정신을 본받고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강릉시 성산면 칠봉로 252[산북리 152번지]에 있다...
-
강릉최씨 필달계 최문옥(崔文沃), 최원량(崔元亮), 최안린(崔安麟), 최세번(崔世蕃), 최인언(崔仁彦) 등 다섯 명의 제향을 위해 건립한 재실 강릉최씨 필달계 동강공휘원량종중(東崗公諱元亮宗中) 소유로 동 문중 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송북재실(松北齋室) 또는 송북전사청(松北奠祀廳)이라고도 한다. 선영 인근의 강릉시 성산면 송두길 5...
-
강릉최씨 필달계 용연동파의 전사청.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 있는 이 재사는 강릉최씨 필달계 용연동파 정가(井街) 종중 소유로 최대흥(崔大興)을 제향한 곳이다. 최대흥[1564~1638]의 자는 자성(子性)이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1860년(철종 11) 후손들이 선조 전사 시 재실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
-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위패를 모신 사당. 강릉시 저동길 113[저동 293번지]에 있는 강릉박씨대종회 소유의 경양사는 신라 일등공신 관설당(觀雪堂) 박제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박제상은 417년에 눌지왕의 명을 받고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동생 복호(卜好)를 데려 왔고, 다음에는 일본에 가서 볼모로 잡혀 있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신라로...
-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을 추모하는 유교식 제례. 매년 음력 3월 5일 강릉박씨대종회 주관으로 거행되는 박제상을 추모하는 제례이다. 1939년 강릉박씨대종회가 박제상의 위패를 봉안하면서부터 다례를 시작하였다. 박제상의 위패가 있다. 제관은 강릉박씨대종회에서 논의하여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사, 축관을 선정한다. 이때 강릉시장이 제관으로 참석한다. 유교...
-
강릉시 지변동에 있는 최문한 관련 유적인 용지와 관련된 내용을 적은 비. 최문한은 고려조 인물로 부마(駙馬)였으며, 강릉최씨 문한계 시조이다. 고려부마도위문한공의 유적비에는 최문한이 아끼던 말이 하루는 연못에 뛰어들어 용으로 변해 승천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1920년 후손 최종하(崔宗河) 등이 용지와 용지각을 정비하면서 시조 최문한과 관련된 읍지의...
-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친족, 혈연, 지연, 학연, 촌락, 동문수학, 나이(동갑) 등을 매개로 결성되는 결사체. -‘계(契)’를 아십니까 - 강릉 지역의 전통적인 계문화 계라고 하면 ‘아줌마들’이 식당에서 벌이는 회식 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계모임, 계가 깨졌다, 패가망신… 이런 말부터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목돈을 모으는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식이 계의...
-
조선시대 관리선발 시험.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문과는 식년시와 별시로 나누어 시행되었는데, 식년시는 초시[향시]·복시[회시]·전시의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 강원도의 경우 초시에서 15명을 선발하여 복시에 응시토록 하였다. 또한 사마시는 초시와 복시로만 실시하였는데, 강원도 향시에서는 45명이 선발되어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 중 복시에 합격한 사...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송(權悚)의 묘비. 권송은 안동권씨 추밀공파조 권행의 19세손이며, 강릉 낙향시조이다. 무공랑(務功郞)으로 선원전(璿源殿) 참봉을 지냈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권륜(權綸)의 아들이며, 형은 권구(權懼)이다. 연산군 때 누이가 후궁 숙의(淑義)로 입궐하자 외척으로 지목될 것을 우려하여 한양에서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부인은 삼척심씨 심산보(沈山甫)의 딸...
-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권처평(權處平)의 처 강릉 최씨의 열행(烈行)을 기록한 비 권처평 처 강릉최씨는 진사 최해문(崔海文)의 딸로 임진왜란을 당하자 적소에서 핍박을 피하여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때 권처평의 동생 권처직(權處直)의 부인 김씨도 함께 핍박을 피해 투신하였다. 아들 권덕유(權德裕)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고...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화(權和)[1539~1573]의 묘비. 권화(權和)의 자는 희혜(希惠), 호는 습독(習讀)이다. 권화(權和)는 연곡에 무진정(無盡亭)을 짓고 정자 주위를 거닐며 보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는 이종사촌간이다. 묘비가 오래되어 훼손되자 후손 권학수(權學洙) 등이 율곡 이이가 찬한 묘지명과 가승을 근거로 1884년(고종 21)에 다시 세웠다....
-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금란반월회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던 정자. 금란정은 1889년경에 금란반월회원들에 의해 이건된 것으로 춘하추동 네 번 시행되는 금란반월회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었다. 원래 매학정(梅鶴亭)이었던 이 정자의 명칭은 계명(契名)에 따라 금란정이라 고쳐졌다. 금란정은 금란반월회 참여 인사들의 우의 돈독을 나타내는 의미로 금란지교(金蘭之交)의 뜻...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있던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조선 시대의 창고. 조선 시대 강릉 관아에는 척번대(滌煩臺)가 있었는데, 객사 동북쪽에 있었으며,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이른바 이 척번대는 내빙고(內氷庫) 기능을 갖고 있었다면, 금산리 얼음 창고는 외빙고(外氷庫)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
철이나 청동 등 쇠붙이나 석재(石材)에 기록한 글씨나 그림. 금석문이란 고대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보통 금속에 새겨진 문자와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는 나무에 새겨진 문자나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씨로 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등을...
-
강릉시 왕산면 도마리 소재 금선정(琴仙亭)에 걸려 있는 기문. 금선정은 강릉시 왕산면 도마리 하곡(下谷)에 위치하며, 삼일계원(三一契員)들이 1972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금선정의 이름은 정자 바로 위쪽에 선인당(仙人堂)이라 명명된 바위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삼일계는 왕산면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의해 1963년에 형성되었다. 삼일계를 만든 것은 광복과 한...
-
조선 후기의 충노. 상전인 최택(崔澤)이 세 살 때부터 정성껏 길러 성인으로 성장하게 하였고, 여러 대의 제사를 자기가 보살펴 지냈다. 가묘(家廟)가 허물어져 비바람을 가릴 수 없게 되자 따로 사당을 짓고 기와를 올려 정교하게 꾸미고 신주를 봉안하였으며, 향 피우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상전을 잘 모신 충성스러운 행동으로 어사(御使) 오명준(吳命俊)이 장계(狀啓)를 올려 정려를 받...
-
조선 후기의 선비. 지봉(芝峰) 김몽호(金夢虎)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준엄하고 기풍과 도량이 뛰어 났으며, 기강을 바로잡아 세우며 엄숙단정 하였다. 강릉부사 소두산(蘇斗山)이 벼슬이 갈려 돌아갈 때 대관령을 넘으면서 “내가 비록 너희 고을을 떠나지만 김격(金格), 김니(金柅) 형제는 정말로 두려워하였다.”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
조선 중기의 효자. 할아버지는 김광복(金光輻)이다. 아버지는 김담(金譚)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 첨지(僉知) 최순령(崔舜齡)의 딸이다. 호는 동화(東華). 삼세사효(三世四孝) 중의 한 사람이다. 김경시(金景時)는 김경황(金景滉)의 아우로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자 김경황과 함께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교수(敎授)를 지냈다. 강릉대도호부사...
-
조선시대의 열녀. 시집간 지 사흘 만에 남편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회생시켰으나 남편은 사흘을 더 살다 죽었다. 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죽고 싶으나 시부모가 계시고 또 뱃속에 아이가 들었으니 한때의 슬픔을 참고 견디어 뒤에 바른 길로 가겠노라”고 하였다. 그 뒤 아들을 낳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라”고 가르쳤다. 묘막에서 삼년상을...
-
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 김담(金譚), 동생 김경시(金景時), 아들 김한(金垾) 등 3세에 걸쳐 4명의 효자를 배출한 삼세사효(三世四孝) 중의 한사람이다. 자는 자호(子鎬), 호는 둔암(遯菴). 할아버지는 김광복(金光輻)이다. 아버지는 김담(金譚)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순령(崔舜齡)의 딸이다. 부인은 정해(鄭瀣)의 딸 숙부인 연일정씨이다. 참봉(參奉), 첨추(僉樞)를...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 자는 자용(子容).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 효자공 금산파(金山派) 파조이다. 아버지는 김당(金譡)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대연(崔大連)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광헌(金光軒)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참봉 최읍(崔浥)의 딸과 강릉함씨 함비용(咸備容)의 딸이다. 함비용의 딸은 오봉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함헌(咸軒)의 증손녀이다. 숙부 김담(金譚),...
-
효자정려를 받은 김경휘(金景暉)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김경휘[1553~1613]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착했으며,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뛰어났다.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위급하자 김경휘는 울부짖으며 하늘에 고한 뒤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리자 아버지가 7일을 더 살았다. 돌아가신 뒤에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선조 때 부사 조작(曺綽)...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광국(金光國)[1489~1554]의 묘비. 김광국의 자는 관여(觀如), 아버지는 김세남(金世南), 어머니는 함종어씨(咸從魚氏) 어충경(魚忠敬)의 딸이다. 등과하여 제천현감을 지냈으며 제천 주민들이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부인은 영일정씨 정희소(鄭希韶)의 딸이며, 3남 1녀를 낳았다. 원래 있던 묘갈이 훼손되어 1800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광백의 아버지는 김기(金玘)이고, 할아버지는 김용려(金用礪), 증조는 김보(金黼)이다. 처부는 군수를 지낸 최운상(崔雲祥)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에 입격하였고,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 비인현감(比仁縣監) 재직 시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어 향리들의 작폐가 심해지자 사헌부에 체직(遞職)을 요청하였...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임(子任), 호는 이설당(梨雪堂). 김세훈(金世勳)의 아들이고, 애일당(愛日堂) 김광철(金光轍)의 아우이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1526년(중종 21)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성품이 중후(重厚)하고 덕이 높고 도량이 컸다고 한다. 당시 이기(李芑)나 윤원형(尹元衡)이 세력을 떨치며 권력을 농단할 때에도 자신의 뜻을 전혀...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세훈(金世勳)이다. 안성이씨 이석진(李碩進)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양(金讓)은 직장(直長), 둘째 김인(金訒)은 찰방(察訪), 셋째 김근(金謹) 주부(主簿), 넷째 김겸(金謙)은 별좌(別坐)였고, 사위는 심운(沈雲)과 참판을 지낸 허엽(許曄)이다. 1487년(성종...
-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광철(金光轍)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김광철의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헌납(獻納)을 지낸 김대(金臺)의 후손이다. 후손 김한성(金漢星) 등이 묘비를 세워 그의 행적을 후세에 전했으나 세월이 지나 마모되어 그 행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931년 다시 건립하였다. 김광철의 묘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핸다리에...
-
조선 중기의 선비. 자는 중여(仲輿), 호는 정봉(鼎峰).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24세손으로 고조는 현령(縣令)을 지낸 김윤귀(金允貴), 증조는 증통훈대부좌통례(贈通訓大夫左通禮) 생원(生員) 김필양(金匹陽), 조는 헌납을 지낸 김지(金墀)이다. 1487년(성종 19)에 증통훈대부군자감정(贈通訓大夫軍資監正) 생원공(生員公) 김반석(金盤石)과 진사 최유남(崔洧南)의 딸...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광헌(金光軒)[1485~1539]의 묘비. 김광헌의 자는 중여(仲輿)이다. 조는 헌납 김지(金墀), 부는 군자감정을 지낸 생원 김반석(金盤石), 모는 최입지(崔立之)의 후손인 진사 최유남(崔洧南)의 딸이다. 김광헌은 최치운의 손자인 현감 최세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임경당 김열(金說)이다. 1540년 후손들이 김광헌의...
-
조선시대의 효부·열녀.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고 그 피를 입에 넣어 사흘을 회생시켰다. 남편이 마침내 죽자 자살을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사지내는 날 남편의 시신과 함께 구덩이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자 “시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는데 죽으면 누가 봉양하겠느냐”며 집안사람들이 온갖 말로 타일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낙범(金洛範)...
-
조선시대 효자인 김담(金譚)[1522~1605]의 효행을 기리는 묘비. 김담의 자는 담지(譚之), 호는 보진재(齋眞齋), 본관은 강릉이다. 강릉김씨 부정공파(副正公派) 보진재공(葆眞齋公) 노암파(魯巖派) 파조(派祖)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있을 때 김담의 효행을 천거하며 시를 지었다. 사후에는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삼강행록」...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임경(任卿). 김주원의 후손이며, 5대조는 김윤신(金潤身), 고조는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 김세달(金世達), 증조는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김광언(金光彦), 할아버지는 군자주부(軍資主簿) 김수(金鐩),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참의(參議) 장호(張昊)의 딸이다. 부인은 간재(艮齋) 최연(崔演)의 후손인 최유성(崔有成)...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득의(金得毅)[1595~1653]의 묘비. 김득의는 강릉김씨로 자는 임경(任卿)이다. 김주원의 후손이며, 5대조는 괴당(槐堂) 김윤신(金潤身)이다. 김득의의 묘비는 1818년(순조 18)에 세워졌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리 김득의의 묘 앞에 있다. 안인 대동마을에서 영동화력발전소 사원 사택을 지나자마자 우측 야트막한 산에 있다. 인근...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숙무(叔武), 호는 지봉(芝峰). 김주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수(金鐩)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공조좌랑, 호조좌랑, 정언, 공조참의, 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서 정경세(鄭經世)와 함...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지봉(芝峰) 김몽호(金夢虎)[1557~1637]의 가계 및 행적을 기록한 묘비. 김몽호는 본관이 강릉이고 김주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수(金鐩)이다.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김몽호의 손자인 김시혁(金始爀)과 김시형(金始炯)이 세웠다. 김몽호의 묘가 대관령 넘어 강릉...
-
강릉김씨 김반석(金盤石)의 묘비. 김반석(金盤石)의 자는 자안(子安), 1455년에 출생하였고, 1522년에 병으로 졸하였다. 아버지는 홍천훈도 김지(金墀), 할아버지는 김필양(金匹陽), 증조는 김윤귀(金允貴), 외조는 강릉최씨 최백종(崔伯宗)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최유남의 딸이다. 아들은 김광주(金光輳), 김광헌(金光軒), 김광로(金光輅), 김광복(金光輻)이...
-
조선시대의 효자.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가묘(家廟)에 불이 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신주를 구해냈다. 김병구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신주를 구해낸 사실을 사림에서 알려 호역을 면제받았다....
-
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김수호(金壽浩), 형은 김병렴(金秉濂)이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약을 구하려고 먼 곳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산삼을 얻었으며, 꿩이 품으로 날아들어 아버지께 잡아 드렸다. 김병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효자. 김수호(金壽浩)의 아들이다. 동생은 효행으로 감찰에 증직되었던 김병락(金秉洛)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상을 치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김병렴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
조선시대의 열녀. 평소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다. 하루는 시어머니와 함께 자다가 시어머니가 변소에 간다기에 부축하여 문을 나섰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시어머니를 잡아가려 하였다. 최씨는 한 손으로 시어머니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호랑이를 내리쳤다. 호랑이는 몇 발자국을 끌고 가다 버리고 달아났다. 최씨는 시어머니를 업고 돌아와 정성껏 치료하였으나 이튿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정숙(正淑) 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16년 증광시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 사간원 정언(正言),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正言)이었을 때 폐모(廢毋)를 주장하던 이조좌랑 황덕부(黃德符) 등을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되었고, 1...
-
조선 전기의 무신. 김여명의 증조는 정순대부전객령(正順大夫典客令)으로 진사에 입격한 김천(金蕆), 조부는 봉정대부지통주사를 지낸 김용수(金龍壽), 아버지는 현신교위좌군중랑장(顯信校尉左軍中郞將)을 지낸 김중상(金仲祥), 어머니는 손씨로 조봉대부전의소감(朝奉大夫典醫少監) 손륜(孫倫)의 딸이다. 부인은 선교랑홍원현감(宣敎郞洪原縣監)을 지낸 김지(金輊)의 딸이며, 이름은 김단묘...
-
조선 전기 무신인 김여명(金汝明)의 묘비. 강원도 강릉시 저동 숭덕재 근처의 김윤신 묘 앞에 김윤신 신도비와 함께 있다. 화강석 재질의 방형비좌 위에 오석 재질의 비신이 놓여 있다. 비신의 높이는 96㎝, 비신 너비 42.5㎝, 비신 두께 5.5㎝이다. 비문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兼)를 지낸 최응현(崔應賢)이 짓고,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권적(權迪)이...
-
조선시대의 효자. 김연범(金演範)은 효자 김의진(金義鎭)의 현손이고, 보진재(葆眞齋) 김담(金譚)의 후손이다. 증광초시(增廣初試)에 올랐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비상하였다. 여섯 살 때에 참새를 쫓는 소리를 듣고 시를 짓기를 “넓은 들 곳곳에 새 쫓는 소리, 천년을 한결같이 신농(神...
-
김연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김연생(金演生)[1859~1921]은 강릉김씨 김병도(金秉鍍)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성심껏 공경하였으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맛있는 나물이나 고기가 생기면 자기의 입에 대는 일이 없이 아버지에게 드렸으며, 혹간 밖에서 별미의 음식을 보게 되면 그것을 나무 잎사귀에 싸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
조선 중기의 문신. 1507년(중종 2) 강릉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강릉부사(江陵府使) 벼슬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김연수가 강릉부사(江陵府使) 직을 그만 둔 것은 당시 도사(都事)에게 욕을 받자 이에 굽히지 않고 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조에서 그를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임명하였다. 충청도별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졸하였다. 김연수에 대한 기사는 『증수...
-
조선 중기의 학자인 임경당(臨鏡堂) 김열(金說)의 묘비. 김열은 1506년(중종 원년)에 출생하였으며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25세손으로 진사 김광헌(金光軒)의 장자이다. 관직은 평강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세칭 임영처사(臨瀛處士)로서 강릉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1812년(순조 12)에 6세손 김처진(金處鎭), 김국명(金國嗚), 8세손 김재...
-
조선시대의 선비인 김영연(金永淵)의 묘비. 김영연은 강릉김씨로 아버지는 호조참의를 지낸 회정(檜亭) 김자흠(金子欽)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를 지낸 강릉최씨 최득유(崔得濡)의 딸이다. 부인은 강릉최씨 생원 최맹섭(崔孟涉)의 딸이다. 성품이 고명하여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묘소 앞에 있던 옛 묘비가 오래되어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워지자 1959년 15세손 김진봉...
-
조선시대의 효자. 강릉 정동(丁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경포동 사람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이웃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며, 행실이 바르고 절도가 있어 친척과도 화목하였다. 나이 6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으며,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 사림에서 효행을 부영(府營)에 알려 표창을 하였다....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운성(金雲成)은 보따리 장사를 하느라 영남 지방에 갔다가 죽었다. 당시 부음을 듣고 시신을 거두려 곧 달려가려 했으나 늙으신 어머니와 어린애들이 있어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 후 마침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하자 마음을 굳게 먹고 남편이 죽은 곳으로 떠났다. 그런 다음 남편의 유골을 거두어 짊어지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
강릉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인 김윤신(金潤身)의 묘비. 김윤신(金潤身)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 출신이다. 호는 괴당(槐堂), 자는 덕수(德叟)이다. 금란반월회를 창계했던 인물 중에 한사람이다. 김윤신 사후에 후손인 판서(判書) 김상익(金尙翼), 김형진(金衡鎭) 등이 주도하여 비를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저동 강릉김씨 옥가파 종산(宗山)...
-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인 김윤신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김윤신의 호는 괴당(槐堂)이다. 금란반월회를 창계했던 인물 중에 한사람이다. 만년에 낙향하여 향약(鄕約)을 저술하였다. 1766년(영조 42) 김윤신의 후손 김형진(金衡鎭)이 찬하고 판서 김상익(金尙翼)이 서한 의정부사인구비(議政府舍人舊碑)가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어...
-
효자 김응일(金應一)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김응일[1598~1660]의 자는 덕문(德文),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3년간 율봉찰방(栗峯察訪)을 역임하면서 풍흉에 따라 조세를 거두고 구휼을 지극히 하였다. 아버지 난사공(煖沙公) 김경윤(金景潤)이 기침병이 들자 엄동설한에 석청(石碃)과 석회(石灰)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3일간 기도하였다. 이때 꿩이 소리를 내며...
-
조선 중기 문신인 김이려(金以礪)의 묘지석(墓誌石). 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묘지명이다. 김이려의 자는 성지(成之), 본관은 강릉이다. 조부는 찰방을 지낸 김석견(金石堅), 아버지는 교수를 지낸 김보(金黼)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신(權伸)의 딸이다. 김이려는 1487년(성종 18)에 출생하였으며, 1552년(명종 7)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참봉 김세달(金世達)의 딸...
-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인(金訒)의 묘지석(墓誌石). 김인[1516~1571]의 자는 대인(大仁)이다. 본관은 강릉이며 김주원의 후손이다. 증조는 증통정대부 예조참의 행봉정대부 사간원헌납(贈通政大夫 禮曹參議 行奉正大夫 司諫院獻納)을 지낸 김대(金臺), 할아버지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봉정대부 종부시첨정(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奉正大夫 宗簿寺僉正)을 지낸 김세훈(金世勳), 아...
-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자흠(金子欽)의 신도비. 김자흠은 1444년(세종 26)에 과거에 올라 수직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김자흠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두호미(豆乎彌)에 있다. 화강암 비좌, 비신, 지붕돌[옥개석]로 만들어졌으며, 전체 높이는 272.5㎝이고 비신의 폭은 82㎝이다. 1971년에는 후손들이 신도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
-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집(金鏶)의 묘비. 김집(金鏶)[1614~1664]의 자는 기지(器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김성철(金聲徹)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최승안(崔承安)의 딸이다. 부인은 삼척김씨 김준남(金俊男)의 딸이다. 김집은 품성이 중후하고 언어가 신중하며 경서에 열중하여 향중에서 덕행이 뛰어난 사람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1946년 9세손 김장묵(金長...
-
강원도 강릉에 입향한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하는 홍씨(洪氏). 남양홍씨의 시조는 홍은열(洪殷悅)이고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 일대에 입강한 시조는 홍대기(洪大棋),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 일대의 입강시조는 홍충양(洪忠陽)이다. 홍충양은 강릉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공 홍인국(洪仁國), 홍인업(洪仁業), 홍인선(洪仁...
-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가톨릭 관동 대학교 내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지. 내곡동 유적은 강원도 강릉시 범일로579번길 24[내곡동 522] 가톨릭 관동 대학교 내 실내 체육관 및 테니스장 일대 송림 지역으로 동경 128°52´29.98˝~128°52´41.39˝, 북위 37°44´11.46˝~37°44´19.09˝이다. 이 일대는 해발 35m 내외의 평탄면...
-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노추산 자락에 있는 3,000여 개의 돌탑. 차순옥 할머니는 결혼한 후 4남매를 두었으나 아들 둘을 잃고 남편은 정신 질환을 앓는 등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40대 중년에 접어들던 어느 날, 할머니는 꿈속에 나타난 산신령으로부터 계곡에 돌탑 3,000개를 쌓으면 집안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강릉 시내에 살...
-
강릉함씨 시조 함부림(咸傅霖)[1360~1410]의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함부림(咸傅霖)의 호는 난계(蘭溪), 시호는 정평(定平).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와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1907년 후손 함동호(咸東鎬)가 낙향시조의 행적을 소상히 전하고...
-
신사임당의 자녀 이매창이 그린 매화 그림과 이옥산이 그린 국화 그림. 매창(梅窓)은 신사임당[1504~1551]의 맏딸이고 옥산(玉山)은 막내아들이다. 두 사람 모두 어머니 사임당의 예재(藝才)를 받아 예능(藝能)에 뛰어난 솜씨를 가졌다. 후손인 이장희 가에 소장되어 오던 것을 1965년에 2개로 나누어 오죽헌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현재는 후손이 강릉 오...
-
조선 후기 선비인 김형진(金衡鎭)이 경포대 북쪽 증봉(甑峰)[시루봉] 아래에 지었던 정자. 김형진의 개인 정자였던 매학정은 19세기 초반 경에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계인들에 의해 매입되었다. 후에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371번길 57[저동 15-1], 지금의 금란정(金蘭亭) 자리로 옮겨졌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정범조(丁範祖)가 쓴 「매학정기(梅鶴亭記)」와...
-
조선 중중 때의 권연(權璉)이 소요하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 명암정(鳴岩亭)은 강릉시 대전동 서쪽 산기슭에 있다. 명암정은 경포호의 상류로서 명천반석(鳴泉盤石)이 있으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명암정은 강릉 출신으로 조선 중종 때에 학덕을 겸비한 권연이 청유(淸遊)하였던 곳이다. 1922년 권현의 후손인 권영만(權寧萬)과 권영기(權寧機) 등이 선조가 청유...
-
강릉박씨 판관공 종중 소유의 재실. 모선재[운정동]는 강릉박씨(江陵朴氏) 판관공(判官公) 종중(宗中) 인물들 중에서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고 행영흥판관(行永興判官)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을 지낸 박중신(朴中信),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지가 된 박시원(朴始元),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지와 북병사(北兵使)를 지낸 박시창(朴始昌), 홍문박사(弘文博士) 동...
-
박자검(朴自儉)의 묘제를 위한 재실. 강릉박씨 판관공 종중 소유인 모선재[저동]는 박자검의 제향을 위한 전사청이다. 일명 경포재청(鏡浦齋廳)이라고도 한다. 박자검은 강릉박씨 시조 박순(朴純)의 6세 손으로 1364년(공민왕 13)에 출생하였으며 1443년(세종 25)에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자검은 1392년(태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18년(...
-
강원도 강릉 지역에 있는 문화적 활동의 결과물로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 혹은 지방 자치 단체에서 지정, 관리하는 문화유산. 문화재란 인간이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문화 활동에 의하여 창조된 결정으로서 문화상으로 가치가 있는 것, 즉 종교·철학·예술 기타 고도의 정신 작용에 의하여 가치가 주어진 것을 말한다. 강릉시는 동해안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밀양박씨 정재공파의 낙향시조인 박계립의 신도비. 박계립(朴啓立)은 고려밀성부원군대제학보조공신(高麗密城府院君大提學輔祚功臣) 정재공(貞齋公)의 후손이며, 밀양박씨 정재공파 북동대종중(密陽朴氏貞齋公派北洞大宗中)의 낙향 시조이다. 박계립의 호는 눌암(訥庵)이다. 김제 흥복동(興福洞)에서 1620년(광해군 12) 아버지 진사 박지봉(朴芝鳳)과 어머...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공달(朴公達)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박공달[1470~1553]의 자는 대관(大觀), 호는 사휴당(四休堂), 강호만호(江湖晩湖), 사지(四止)이고 본관은 강릉이다. 박공달은 1519년(중종 14) 7개 항목의 천거명목(薦擧名目) 중 성품과 행실이 돈독하였기 때문에 김정이 현량과에 천거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1976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후손...
-
조선 후기의 효자·충신. 자는 학노(學老), 호는 경운(畊雲). 정재공(定齋公) 박계립(朴啓立)의 후손이다. 1788년(정조 12)에 태어났다. 어버이를 섬기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워 효자로 칭송받았다. 신체가 장대하여 용력(勇力)이 매우 뛰어나 1829년(순조 29) 입번시(入番時) 대궐에 불이 나자 사나운 불길을 진화하는 등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
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더욱 공경하며 모셨다. 관찰사가 표창을 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관가에서 효열 완문을 발급하였다. 박구호 처 장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수량(朴遂良)[1474~1546]의 묘비. 삼가 박수량은 1474년(성종 6) 강릉에서 출생한 인물로 현량과에 피천되어 용궁현감을 지냈다. 1814년(순조 14) 박수량의 행적을 기리고 후대에 보전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방동하리 박수량 효자각 안에 효자비, 효자각기와 함께 있다. 효자각 옆에는 쌍한정이 있다. 비...
-
강릉 경포대를 건립한 고려 후기의 지방관리. 1326년(충숙왕 13) 박숙정이 존무사(存撫使)로 강원 영동 지방을 순행할 때 강릉 경포대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박숙정이 건립한 경포대는 현재 전해지는 경포대가 아니다. 즉 그가 경포대를 건립한 곳은 현재 경포현대아파트 옆 인월사 뒤 높은 대(臺)에 세웠다. 이곳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것은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 한급에...
-
조선 전기의 문신. 박제상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회양교수를 지낸 박영근(朴榮根)이고 어머니는 강릉최씨 사직(司直) 최방(崔滂)의 딸이다. 박승소(朴承紹), 박승서(朴承緖), 박승필(朴承弼) 등 3명의 동생을 두었다. 부인은 영해이씨 이중원(李仲元)의 딸이다. 기묘사림이며 효자정려를 받았던 박수량(朴遂良)의 아버지이다. 강원도 강릉시 시루봉길68번길 18[난곡동...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승휴(朴承休)의 묘비. 박승휴는 박제상의 후손으로 기묘사림이며 효자정려를 받았던 박수량(朴遂良)의 아버지이다. 1910년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 묘소에 있던 비가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의 마모가 삼해지면서 알아 볼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재건립을 논의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시루봉길68번길 18[난곡동 51번지] 선영...
-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소(子昭). 강릉박씨 양주파(襄州派)의 파조이다. 고조는 박연(朴演)으로 고려 때에 국자박사(國子博士)였고, 증조 박지계(朴之桂)는 고려 때에 예문관제학참지정사(藝文館提學參知政事)를 지냈다. 조부는 박자검(朴自儉)으로 조선 세종 때에 단천군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박중신(朴中信)으로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
-
조선 전기 문신으로 강릉박씨 양주파(襄州派)의 파조인 박시문(朴始文)의 묘비. 박시문의 자는 자소(子昭)이다. 1486년(성종 17)에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 평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박시문은 만년에 낙향하여 금란반월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95년 후손들이 선조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증봉 아래, 즉 경포호 서쪽...
-
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 부터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가서는 시부모님을 더욱 정성껏 공경하였다. 박시언 처 김씨의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알려져 암행어사와 관찰사가 포상을 하였으며,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
조선 전기의 무신. 고조는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박연(朴演), 증조는 고려 때 예문관제학참지정사(藝文館提學參知政事)를 지낸 박지계(朴之桂)이다. 조부는 박자검(朴自儉)으로 조선 세종 때에 단천군수를 지냈다.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낸 박중신(朴中信)이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강릉김씨 김예(金輗)의 딸과 광주이씨 이초지(李初之)의 딸이다. 박시창(...
-
조선 전기의 무신. 호는 수암(修庵). 고려 때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낸 박연(朴演)이 고조이고, 고려 때에 예문관제학참지정사(藝文館提學參知政事)를 지낸 박지계(朴之桂)가 증조이다. 할아버지는 박자검(朴自儉)으로 조선 세종 때에 단천군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을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박중신(朴中信)이다. 어머니는 강릉김씨...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시행(朴始行)의 묘비. 박시행의 자는 가원(可遠), 호는 송계당(松桂堂)이다. 1468년(세조 14)에 생원에 올라 평창훈도(平昌訓導)를 지냈으며, 146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그리고 고성(高城)·영월(寧越)·안변(安邊) 및 금교찰방(金郊察訪)을 지내...
-
조선 후기의 선비. 아버지는 학생(學生) 박상의(朴尙義)이다. 박시혁(朴時赫)[1747~?]은 순조 4년(1804) 식년생원에 1등으로 입격하였다. 합격 당시 나이는 57세였으며 직역은 유학(幼學)이었다. 박시혁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시형(朴始亨)의 묘비. 박시형의 자는 경원(景遠), 호는 국포(菊圃) 또는 동원(東原)이다. 세조 때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장령, 호조좌랑, 홍문관교리동부승지, 안동부사, 춘추관수찬, 예문관직제학을 지냈으며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박시형의 묘소에 원래 있던 비석이 훼손이 심해지자 1981년 11세손 박태구(朴泰九)...
-
조선 중기의 효자인 박억추(朴億秋)[1523~1590]의 묘비. 박억추의 자는 덕수(德叟), 호는 농헌(聾軒)이다.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효행으로 효자 정려를 받았으며, 효렴과로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 청하현감(淸河縣監), 영평부사(永平府使),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박억추 묘소에는 원래 오래 전에 세운 묘표가 있었으나 풍파로 훼손이 심하여 후손 박객...
-
조선 전기의 선비인 박영근(朴榮根)[1427~1497]의 묘갈. 박영근의 자는 영숙(英叔)으로 영민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22세에 사마시에 올랐으나 병으로 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최방(崔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박승소(朴承紹), 박승휴(朴承休), 박승서(朴承緖), 박승필(朴承弼)이다. 넷째 아들 박승필이...
-
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이 병이 나서 산 꿩을 먹고 싶어 하였다. 하늘에 꿩을 구할 수 있기를 빌었더니 다음날 아침 꿩이 닭장에 들어와서 이를 잡아 주었다. 남편의 병이 위중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주고 다시 또 한 손가락을 찢어 연달아 그 피를 입에 넣어 소생시켜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열행이 알려져 강릉부사와 어사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
조선 전기의 문신. 자(字)는 숙립(叔立). 할아버지는 봉선대부서운부정(奉善大夫書雲副正) 박지계(朴之桂)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지단천군사(通政大夫 知端川郡事)를 지낸 박자검(朴自儉)이며 어머니는 봉정대부 봉상부령지제교 겸 예문춘추관편수관 성균직강(奉正大夫 奉常副令知製敎 兼 藝文春秋館編修官 成均直講) 밀성김씨 김지(金祗)의 딸이다. 먼저 강릉김씨 김예(金輗)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
-
조선 전기의 문신인 박중신(朴中信)이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시(式年文科試)에 정과(丁科)로 합격하고 국가로부터 받은 합격 증서. 발급 시기는 1438년(세종 20)이다. 수급자는 단천 군수(端川郡守)를 지낸 박자검(朴自儉)의 아들 강릉박씨 박중신(朴中信)이다. 박중신은 1390년 강릉에서 출생하여 143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永興判官) 등을 역임하였으나, 부모를...
-
조선 전기의 문신. 할아버지는 고려 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박지계(朴之桂), 아버지는 1392년(태조1) 문과에 급제하고 단천군수를 지낸 박자검(朴自儉)이다. 어머니는 밀성김씨로 봉상부령(奉常副令) 김저(金袛)의 딸이다. 박중실(朴中實)은 박자검(朴自儉)의 장남이었고 동생으로는 판관이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된 박중신(朴中信)과 군수를 역임한 박중경(朴中敬)이 있다. 박중실(朴...
-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에 있는 조선 초기 권사균(權士均)이 별당으로 지은 건물. 권사균의 자는 공보(公父), 호는 보진당(葆眞堂)이다. 권사균은 1484년(성종 15)에 태어났으며, 시조는 권행(權幸)이다. 권사균은 학문과 문장이 사림들 가운데 뛰어나 중종반정 다음 해인 1506년(중종 1)에 사마양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추중(推重)...
-
효자 김담(金譚)을 제향한 재실. 보진재(葆眞齋)는 강릉김씨 노암파 종손 김재인(金載仁) 소유로, 하늘이 내린 효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효자 김담의 제향을 위한 재실이다. 제향 시기는 매년 음력 9월 10일이다. 강릉시 모산로223번길 28-10[장현동 334번지]에 숭모재(崇慕齋)가 따로 있다. 보진재는 원래 정려각이었다. 1571년(선조 5)에 강릉부사 봉래...
-
사적(事蹟)을 기념하기위해 세우는 돌. 비(碑)는 보통 비석 혹은 석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석비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석비는 묘비와 탑비·능묘비 외에도 비문의 내용이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의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주는...
-
신석규, 신석구 형제와 종형제인 신석로, 신석리 형제의 학덕과 의행을 추앙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 이들 친, 종형제간인 4명은 홍문박사 신금연의 후손으로 강릉의 양대 서원인 오봉서원과 송담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모두 학덕이 높고 우애가 돈독하여 매일같이 함께 도봉(道峰)에서 시와 술로 소요동락(逍遙同樂)하였다. 4명을 가리켜 도봉사선(道峰四仙)이라 하였는데...
-
선조나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곳. 사우(祠宇)는 선현 봉사와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건립된 서원과 문중의 중요 인물의 제향처로 활용되었던 재실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강릉 지역에서는 서원은 2개이고, 사우는 12개, 당은 4개, 재사는 56개이고, 기타로 문정공부조묘와 종선각이 있다. 위의 현황에서 향중사림이나 부민 발의로 건립된 오봉서원, 송...
-
조선시대 향촌 사회 운영을 주도한 세력. 사족은 조선 사회의 지배계층으로서 향촌 내에서 통혼권과 학맥의 형성, 농장 소유로 인한 경제적 토대 마련 등을 통해 지역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동시에 과거급제를 통한 정계진출과 조선시대 국가통치 이념인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지역사회에 구축하면서 향촌사회 운영을 주도하였다. 조선 초기에 향촌세력은 향리를 중심으로 한 이족과 고려 말 품관을...
-
...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삼척심씨의 시조는 심동로(沈東老)이다. 심동로의 처음 이름은 심한(沈漢)이고 호는 신재(信齋)이다. 1342년(충선왕 2) 출생하였으며 공민왕 10년 봉순대부예의판서(奉順大夫禮儀判書)를 마지막으로 퇴관하고 삼척으로 낙향하였다. 공민왕은 심한이 삼척으로 낙향하자 퇴관에 대한 예우로 ‘동귀안로(東歸安老)’의 뜻을 따서 동로(東老)라...
-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과 회산동 지역에 형성된 삼척심씨들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 삼척심씨는 고려 공민왕 때 심동로(沈東老)가 개성으로부터 강원도 삼척군으로 이주하면서 강원 영동지방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심동로 이후 자손들이 강릉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에 영구히 정착하였다. 이후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강릉시 운정동, 회산동, 그리고 강동면 모전리 일원에 집성...
-
최치운(崔致雲), 최응현(崔應賢), 최수성(崔壽峸)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 강릉최씨[필달계] 종중에서는 조은(釣隱) 최치운, 수헌(垂軒) 최응현, 원정(猿亭) 최수성을 최씨삼현(崔氏三賢)이라 칭송한다. 이에 삼현의 신도비를 함께 보관하고 있는 비각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강릉최씨[필달계] 종중에서는 1957년 최수성의...
-
강릉시 저동 경포 호반에 있는 상영정(觴詠亭)의 건립 내력과 중수 사실을 기록한 기문. 상영정(觴詠亭)은 1886년(고종 23) 향유(鄕儒) 16인이 합심하여 만든 상영계 계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는 경포대 동쪽의 호수를 향한 산록에 건립되었으며, 금란정과 인접해 있다. 그러나 당초에는 오봉산(五峯山)과 영귀암(詠歸岩) 사이에 건립되었으며, 1908년(순...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갈매간길 8-3[금산리 620번지]에 있는 별당 양식의 한옥 목조 건축물.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는 김열(金說)의 아호(雅號)를 딴 임경당(臨鏡堂)이 두 곳 있다. 강릉 가까운 쪽에 있는 것을 임경당’이라 하고 마을 위쪽에 있는 것을 상임경당이라 하며 임경당과 구분하여 ‘진사댁’으로 부르기도 한다. 강릉시 성산면 영동대학에서 강...
-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 기관. 조선왕조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후 서원은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증설되었다. 서원은 사림의 장수(藏修)·강학(講學)의 장소이다. 사림들이 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던 까닭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이 과정에서 재지사족층의 사회적 역할을 제...
-
강릉 지역에 거주하는 성씨. 성(姓)은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제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성을 널리 쓰게 된 것은 고려 중엽부터이다. 성에는 관(貫)이 있는데, 적(籍)·본(本)·본관(本貫)·관향(貫鄕)이라고도 한다. 강릉에 거주 해 온 성씨와 관련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성씨조(姓氏條)」를 통해 그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本貫)은 진주(晉州). 자(字)는 망여(望汝), 호는 월주(月洲). 부(父)는 소동명(蘇東鳴), 조부(祖父)는 소억선(蘇億善), 증조부(曾祖父)는 소건(蘇建), 장인은 권식(權植)이다.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장원, 전적을 거쳐 1663년 정언·지평이 되었다. 직언 때문에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
경주손씨의 강릉 입향시조인 손종복(孫宗復)의 묘비. 손종복은 임진왜란을 피해 강릉 금광평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부인은 해주오씨이다. 3남을 두었는데, 손도길(孫道吉), 손덕길(孫德吉), 손준길(孫俊吉)이다. 1989년 후손 손호승(孫鎬承) 등이 입향시조인 손종복의 입향경위와 행적 그리고 선대와 후손의 가계를 정리하여 비를 세웠다. 손종복의 묘가 있...
-
율곡 이이를 배향하기 위해 강릉 사족들이 세운 서원. 송담서원은 1624년(인조 2)에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왕현 왼편 아래쪽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1630년(인조 8)에 완공되었다. 이때 강릉 유생 최언침(崔彦琛) 등이 청액(請額)을 상소하였으나 인정받지 못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강릉 유생 김속(金涑) 등이 재차 청액을 상소하여 이해 3월에 사액되었...
-
송담서원에서 개최되는 율곡 이이를 제향하는 다례. 송담서원은 율곡 이이를 배향한 서원이다. 이에 매년 2월 음력으로 그달의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인 중정일에 송담서원 송담사에서 다례를 봉행한다. 다례의 주관기관은 강릉유림회이다. 송담서원 축문 유세차운운 후학 모관성명 감소고우 문성공율곡이선생 발휘도묘 승계정통 공숭덕강 백세흠봉 근이자성 예제식진 비...
-
송담서원의 건립내력과 사적을 기록한 비. 송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1630(인조 8년)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비문에는 율곡 이이의 행적과 외가에 대한 내용 그리고 서원의 창건과 이건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율곡 이이를 배향한 서원의 사적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율곡 이이의 후학들인 지역 유생들과 문인들이 건립하였다. 강릉...
-
강릉최씨 종중 입지계에서 선조 추모와 문중 회합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 강릉시 장현동 장현저수지 근처의 송현(松峴)에 있다. 강릉최씨 판서공(判書公) 입지계의 최사광(崔斯廣)과 춘헌공(春軒公) 최수(崔洙)의 묘소 인근이다. 1946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누정이 있는 장현동은 동원군(東原君) 최씨 세거지이다. 이곳 세거지에 장현저수지가 만들어...
-
강릉김씨 평의공파 선조들의 묘제를 위해 건립한 재실(齋室). 강릉김씨(江陵金氏) 평의공파(評議公派) 재실로 주변에는 평의공파 묘소가 다수 분포해 있다. 김지(金輊), 김자흠(金子欽), 김자장(金子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재실의 구성은 정면에 숭덕재, 좌우측에 동재와 서재 그리고 입구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 밖에는 숭덕재중건기념비(崇德齋重建記念碑)가...
-
강릉김씨 평의공파 종중 소유의 숭덕재 건립 내력과 중수 사실을 적은 기문. 숭덕재(崇德齋)는 일명 두호미재(豆乎彌齋)로 강릉김씨 평의공파(評議公派)의 파조(派祖)인 김지(金輊)를 모신 곳으로 1564년에 건립되었다. 1564년 김지의 후손들이 숭조애친사상(崇祖愛親思想)을 고취하고 종친화합(宗親和合)을 도모하며, 종토(宗土)에서 생산되는 도조(賭租) 및 기타 수...
-
강릉함씨 오곡댁 종중이 선대 시제(時祭)의 전청(奠廳)으로 사용한 재실. 숭선재(崇先齋)는 강릉함씨(江陵咸氏) 오곡택(梧谷宅) 재실로 1910년경에 건립하였다. 선조 시제 봉행시 우천으로 봉행에 어려움이 있자 종회를 열어 선영 인근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제향일은 매년 음력 10월 15일이다. 강릉시 유천동 177번지 오곡동(梧谷洞)에 있다. 1961...
-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을 모신 사당. 여말선초에는 흥복암(興福庵)이라 하였으나 17세기에 숭의재라 하였다. 숭의재(崇義齋) 안에는 강릉김씨의 시조 명주군왕 김주원의 5대조인 태종무열왕의 위패를 봉안한 숭열전이 있다. 오래 전부터 종묘를 세워 태종무열왕에 대한 향화(香火)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훼철된 후 강릉김씨 자손들의 숭조 정신에 입각하여 김진만(金振晩...
-
명주군왕 전사청인 숭의재와 태종무열왕을 추모하기 위한 숭렬전(崇烈殿)의 창건과 중수의 내용이 담긴 기문. 1818년 유학 김성일(金聲鎰)과 진사 김학무(金學娬)가 쓴 「사촌재사중수기(沙村齋舍重修記)」, 1823년 후손 김계급(金啓汲)이 쓴 「재방중수기(齋房重修記)」, 1871년 교삼(敎三) 김병락(金秉洛)과 김연학(金演翯)이 쓴 「재사중수기(齋舍重修記)」, 1885년 작...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 고려 때의 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증조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할아버지는 신자승(申自繩), 아버지는 신숙권(申叔權),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부인은 이사온(李思溫)의 딸 용인이씨이다.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는 장인우(張仁友)의 부인, 둘째는 이원수(李元秀)의 부인인 신사임당(申師任堂),...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명화(申命和)의 묘소 앞에 세운 비석. 신명화는 중종 대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류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었다. 외손인 율곡 이이와 오죽헌(烏竹軒) 권처균(權處均)이 신명화의 묘를 강릉부 북쪽 두왕동(豆旺洞),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조산리로 이장한 이래 외손들이 봉사(奉祀)한다. 1885년(고종 22) 외손인 권인식(權麟植) 등이 신명화의...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영월. 호는 북천(北川).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와 의주진관(義州鎭管) 옥강만호(玉江萬戶)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올랐으나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그리고는 재산을 모아 갑부가 되었다. 1688년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호해정(湖海亭)에서 강론할 때 김창흡에게 별도로 집 한 채를 지어 주고...
-
조선 후기의 선비. 조선 후기의 무신인 신성하(辛聖河)의 손자이다. 1688년 여름 신성하(辛聖河)가 호해정 옛터에 초옥 4칸을 지어, 삼연 김창흡(金昌翕)이 이곳에서 도학을 강하고 역학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고원명(高遠明), 신석동(辛碩東), 김응경(金應鏡) 등이 있었고, 신정복(辛正復)은 아직 어린 학동이었으나 역시 김창흡의 문인이 되었다...
-
심응란(沈應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 심응란[1790~1836]의 자는 경언(景言), 본관은 삼척,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심기영(沈耆永)의 아들이다. 심응란은 어버이의 병이 위독하자 낮에는 의원을 불러 치료하고, 밤에는 하늘에 어버이 대신 자신이 앓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버이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기에 하늘에 절하고 조용히 빌었더니 문득 꿩...
-
쌍한정(雙閒亭)에 있는 기문(記文)과 중수기(重修記). 쌍한정은 1520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정자는 그 후손들에 의해 중수되었다. 박수량과 박공달은 쌍한정 옆에 있는 일유암(日遊巖)에서 함께 만년을 보냈다. 이로 인하여 ‘촌옹박리인일유암(村翁朴里仁日遊巖)’이라 새겼으니 지금까지 새긴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쌍한정에는 운곡(雲谷) 송한필(宋...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안동권씨의 시조는 권행(權幸)인데 신라 때에는 김씨였다. 본래 신라에 속하였고, 뒤에 후백제(後百濟)의 지배하에 있던 고창(古昌)[안동]의 수령(守令)으로 있다가 견훤(甄萱)이 신라 경애왕(敬哀王)을 자살하게 한 데 대해 분개하던 중 고려가 고창에서 후백제군을 무찌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왕건이 그 공적을 인정하여 권씨...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안동김씨 시조에 대해서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이라는 설, 김숙승의 손자인 김이청(金利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안동김씨 세보』에는 김이청의 증손이며 고려조 명장인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강릉 입향시조는 김방경의 9세손인 김기(金沂)이다. 김기의 자는 영이(詠而)이고 조선 개국...
-
강릉시 교동에 있는 안동김씨 3대와 그들의 아내 2명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열각. 안동김씨 삼세삼효이열지려(安東金氏 三世三孝二烈之閭)는 안동김씨 김몽상(金夢相)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김씨의 열녀비, 김몽상의 아들 김석진(金錫晋)의 효자비와 그의 처 강릉최씨의 열녀비, 김석진의 아들 김구(金坵)의 효자비가 있는 효열각(孝烈閣)이다. 김몽상은...
-
강릉 지역에 거주하며 본관이 양천(陽川)인 허씨(許氏).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선문(許宣文)으로 금관가야(金官伽倻) 김수로왕(金首露王)의 30세손이다. 허선문은 양천에 세거하면서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고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미를 제공하였고, 이에 왕건은 양천을 식읍으로 주고 가부(假父)라 하였다. 강릉 낙향시조는 허선문의 20세손인 허엽(...
-
조선 후기의 문신인 어유룡(魚有龍)[1678~1764]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 어유룡(魚有龍)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경우(景雨), 본관은 함종(咸從), 1710년 진사에 입격하였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0년부터 1732년까지 강릉대도호부사를 지냈다. 1732년 강원도 관찰사로 승진하여 교체되었다. 어유룡(魚有龍)이 강릉대도호부사로...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 민칭도(閔稱道)는 공자(孔子)의 제자 자건(子騫)의 후예이다. 고려 때 사신으로 왔다가 상의봉어(尙衣奉御) 벼슬을 하였고 그후 여흥에 정착하여 살았다. 낙향시조 민우중(閔友仲)은 강릉 오죽헌에 살던 공조참판(工曹參判) 함안(咸安)의 딸과 혼인하여 경기도 직산(稷山)에서 강릉으로 오던 중 원주 우관(郵官)에서 별세하였다. 아들 민익(閔...
-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강원도 강릉시의 역사. 강릉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 유적지를 통해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선사 유적지는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송림리, 사천면 가둔리·판교리, 강동면 안인리·하시동리, 강릉시 토성지와 지변동·교동·안현동, 옥계면 금진리 등 대부분 바닷가 호수변이나 하천 유역의 낮은 구릉 지대에서 발견되었다. 1992년...
-
이진삼(李鎭三)의 처 평택임씨(平澤林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열녀각(烈女閣). 어느 해 임씨의 남편 이진삼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배편으로 장삿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배가 영해 축산포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임씨의 남편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늦게 남편의 죽음과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임씨는 그날로 배를 타고 축산포로 갔다. 며칠 동안 거...
-
안성이씨 영재(瀛齋) 이석진(李碩珍)의 묘제를 지내기 위해 건립한 재실. 이석진의 호는 영재(瀛齋), 자는 세보(世寶)이며 안성이씨 강릉 입향시조이다. 1465년 평해에서 출생한 영재는 16세의 나이로 강릉에 들어와 죽헌동에 거주하였다. 1489년 24세의 나이로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지역 유림인 춘헌(春軒) 최수(崔洙), 보진당(葆眞堂) 권사균(權士均...
-
영산신씨 신세린(辛世麟), 신세린의 처 강릉김씨, 신세린의 아들 신붕(辛鵬)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효열각. 신세린(辛世麟)의 처 김씨(金氏)는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구해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씨는 늘 애통하게 울면서 간장을 먹지 않았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
창녕조씨 조호겸(曺好謙)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영신재(永愼齋)는 창령조씨 혜재문중(蕙齋門中) 소유로 원래 강릉시 교동에 있었고 창녕조씨 휘(諱) 조호겸(曺好謙)의 제향처였다. 조호겸의 자(字)는 성익(聖益)이다. 조호겸의 고조 조계상(曺繼商)은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지냈고, 증조인 조명원(曺明遠)은 예조참판(禮曹參判), 할아버지인 조대승(曺大勝...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신씨는 본래 중국에서 들어 온 성씨로 신시랑(辛侍郞)과 엄시랑(嚴侍郞)이 신라 경덕왕 때 파락사(波樂使)로 신라에 왔다가 당에서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돌아가지 못하고 영월에 들어와 정착한 데서 기원하였다. 신시랑의 후손인 영월신씨의 시조는 신경(辛鏡)으로 1138년(인종 16) 등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다. 고성군수...
-
강릉에 거주하며 본관이 영일(迎日)인 성씨.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영일정씨의 원조는 신라육촌(新羅六村의 하나인 자산진지부(觜山珍支部) 촌장인 지백호(知伯虎)이다. 지백호는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 건국에 공을 세운 인물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진지부(珍支部)가 본피부(本彼府)로 개칭되면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지백호의 원손인 정의...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이연동(李延東)은 고려 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으며, 영해군(寧海君)에 책봉되었다. 이연동을 시조로 하여 전주이씨에서 분파하여 영해이씨가 되었다. 강릉 낙향시조 이장밀(李長密)은 이연동(李延東)의 증손으로 고려 말 봉익대부호부상서(奉翊大夫戶部尙書)를 지냈으며, 강릉최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장밀의 아버지 이을년...
-
영해이씨(寧海李氏) 이성무(李成茂)·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 등 4형제와 이당(李堂)·이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영해이씨의 효자각에는 6기의 비가 보존되어 있다. 6기의 비석은 이성무(李成茂)·이선무(李善茂)·이춘무(李春茂)·이양무(李良茂) 등 4명의 형제와 이당(李堂)과 이민 2명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이다. 4형제는...
-
공자(孔子),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과 함헌(咸軒)을 제향하는 서원. 1777년(정조 1)에 어촌 심언광의 후손인 심상현(沈尙顯)이 어촌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주자의 영정을 계기로 하남영당을 중건하고 서원을 창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인(士人) 김형진(金衡鎭)은 그 영정(影幀)이 진상(眞像)이 아니라고 하면서 명륜당에서 재회(齋會)를 열어 반대한 후 권학준(權漢準...
-
오봉서원(五峯書院)의 건립내력과 연혁을 기록한 기적비(紀蹟碑). 오봉서원에 우암 송시열을 추가로 배향한 후 그 건립시기 이후부터의 내력을 적어 기적비를 세웠다.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 앞 기적비각 안에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212㎝, 비신 높이 161㎝, 비신 너비 67㎝, 두께 14㎝이다. 비신은 오석이고 비좌와 비두는 화강석이다. 비...
-
오봉서원에서 제향하는 의례. 공자(孔子)·주자(朱子)·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함헌(咸軒) 등을 제향한다. 매년 음력 9월 초정(初丁)에 강릉 지역 유림들에 의해 시행된다. 오봉서원에는 공자(孔子),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을 모신 집성사와 칠봉(七峰) 함헌(咸軒)을 모신 칠봉사(七峰祠)가 함께 있으며, 각각의 사당에는 배향인물의 위패가 모셔져 있...
-
오봉서원 건립 배경과 내력 그리고 제향인물 등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 공자 진영의 봉안 인물과 과정 그리고 서원의 건립과정, 주자와 송시열의 제향 등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우암 송시열을 추배한 사실을 추가로 기술하여 1856년(철종 7) 강릉 지역 유림들 뜻을 모아 새로 세웠다.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 오봉서원 앞마...
-
1927년 최명익(崔命翼) 등 정묘생(丁卯生) 동갑계원이 지은 정자. 이 정자는 조선조 강릉부의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던 객사(客舍)의 재목과 기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교육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객사 터에 강릉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를 위해 객사의 건물을 해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갑계원들이 객사의 재목과 기와를 일부 매입하여 오성정을 건립하였다....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고려 인종 때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48세손 복야공(僕射公) 이양식(李陽植)은 만년에 낙향하여 강릉의 속현인 우계현, 즉 지금의 옥계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이양식은 등과(登科)하여 중서사인상서좌복야(中書舍人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고매하고 강직한 기상은 강상(綱常)의 도를 다하여 조야에 칭송이 자자...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던 사우. 정경세의 호를 따서 우복사(愚伏祠)라고 하였고, 일명 도동사(道東祠) 또는 퇴곡서원(退谷書院)이라고도 한다. 정경세는 1613년(광해군 5) 강릉대도호부사에 부임한 후 양몽재(養蒙齋)를 설치하고 강릉향교에 흥학비(興學碑)를 세우고 3년 재임 기간 동안 교화를 크게 행하...
-
경포호수 안에 있는 팔각 누정. 1958년 기해생(己亥生) 동갑계원 28명이 건립하였다. 월파정 위에 새 모양이 세워져 있다. 월파정이란 이름은 경포호수에 비친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는 것에 비유하여 지어졌다. 기해생 동갑 계원들이 소요처로 건립하였다. 월파정은 강릉시 저동 경포호수의 한가운데 새바위에 있는 정자이다. 월파정은 팔각으로 지어...
-
연화부인(蓮花夫人)과 무월랑(無月郞)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연못 구지(舊址)에 있는 누각.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강릉에서 벼슬을 하던 무월랑은 연화(蓮花)라는 아가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무월랑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연화 아가씨를 보고 말하기를 “만일 그대와 전생에 인연이 있다면 부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
강릉최씨 최철집의 처 유인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열비(孝烈碑). 효부이자 열녀인 수원백씨는 강릉시 유천동에서 태어났다. 강릉최씨 최철집에게 시집와 평창군 봉평면 장평리 지석동에 거주하였다. 백씨는 와병 중인 시부모를 위해 낮에는 험준한 산골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봉양하였다. 밤에는 정한수를 길러 기도하기를 수년이나 하였다. 시부모가 임종...
-
조선 후기의 문신인 유헌장(柳憲章)의 공적을 기리는 선정비. 유헌장(柳憲章)은 1707년 강릉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1712년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객사와 관방들을 중수하였으며 향교 대성전 석전제 때 사용하는 돗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굶주린 부민들의 구휼을 위해 자비곡(自備穀) 400석을 내 놓았으며, 후손이 없는 효자정문에 비를 새로 세웠다....
-
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이름·생일·죽은 날·자손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은 판석. 이무강 처 강릉최씨의 아버지는 최수당(崔壽塘)이고 어머니는 비인현감(比仁縣監)을 지낸 신수(辛守)의 딸이다. 조부는 통훈대부금구현령(通訓大夫金溝縣令)을 지낸 최세충(崔世忠)이고, 증조는 가선대부형조참판(嘉善大夫刑曹參判)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이다. 이무강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안성이씨(安城李氏) 강릉 입향조인 영재(瀛齋) 이석진(李錫珍)의 묘비. 이석진의 호는 영재(瀛齋)이며 자는 세보(世寶)이다. 1465년 평해에서 출생하였다. 16세의 나이로 강릉에 들어와 죽헌동에 거주하였다. 1489년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지역 유림인 춘헌(春軒) 최수(崔洙), 보진당(葆眞堂) 권사균(權士均),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우계이씨 시조인 이양식(李陽植)을 추모하는 비. 우계이씨 시조인 이양식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중서사인좌복야(中書舍人左僕射)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선영 동쪽 기슭에 묘소를 쓰고 묘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봉분이 퇴락하고 석물이 멸실되어 1982년 다시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158번지...
-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있던 정자. 일명 건금촌(建金村)에 있던 정자로 정자 앞에 금산평 넓은 뜰이 펼쳐져 있으며, 냇물이 비스듬하게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 냇가에 소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 놓고 휴게소로 가꾸어 푸른 소나무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우거진 솔숲이 비록 길옆이긴 해도 맑은 시내와 가까이 있어 발을 담그고 놀기에 안성마춤이었으며, 노니는 사람들...
-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천변지리(天變地異)로 인하여 발생하는 막대한 인명·재산 등의 피해. 천재지변이라고도 한다. 자연재해는 기상·지변(地變)·생물 등에 급격히 나타난 자연 현상으로 인하여 입는 재난인데, 인간들에 의해 일어나는 인재(人災)와 크게 구별된다. 보통 기상 현상에 의하여 발생하는 기상 재해가 가장 대표적인 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후 지역에 따라 그 피해...
-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신라 말 잠시 강릉에 정착했던 장정필(張貞弼)의 행적을 적은 묘비. 장정필의 자는 영보(寧父), 호는 포음(圃蔭)이다. 장정필은 당나라 소종(昭宗) 898년에 태어나 5살 때 변란을 만나 아버지 대사마공(大司馬公) 장원(張源)과 함께 신라로 피신 와 10여 년 동안 살다가 떠났다. 이후 다시 사신으로 왔다가 태조를 도와 고려 건국에...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전계현(全繼賢)의 묘비. 전계현은 정선전씨로 자는 원구(元龜), 세종 11년(1429) 출생하였으며, 중종 14년(1519) 졸하였다. 부인은 삼척심씨 참봉 심양보(沈梁甫)의 딸이다.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진사 전순지(全舜智), 차남은 문과에 합격하고 교리를 지낸 전순인(全舜仁), 셋째는 습독이었던 전순철(全舜哲)이다. 1849년(철종 1) 후손들이...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전성명(全性命)의 묘비. 전성명의 자는 호천(浩天), 호는 신암(愼庵)으로 신라전법판서(新羅典法判書) 전훤(全愃)의 후손이다. 증조(曾祖) 전우정(全遇禎)은 성균생원이었고, 할아버지 전륜(全崙)은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냈으며 아버지 전민행(全敏行)은 통덕랑행정선훈도(通德郞行旌善訓導)를 지냈다. 전성명은 기자전참봉(箕子殿叅奉)과 희릉참봉(禧...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순인(全舜仁)의 가계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 전순인의 자는 원경(元卿), 아버지는 전계현(全繼賢), 어머니는 삼척심씨 심양보(沈梁甫)의 딸이다. 어촌 심언광, 삼가 박수량과 교유하였다. 1519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비문은 강릉부사를 지낸 박종정(朴宗正)이 지었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심보영(沈普永)이 글...
-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사당. 사당에 봉안된 영정은 1969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 종가 인근에 있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봉향 중인 진영을 서울대학교 서세옥(徐細鈺) 교수가 모사한 것이다. 개성 숭양서원에서 모사한 영정은 퇴색되어 환봉(還封)하였다. 1934년 후손 정기용(鄭起鎔)이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진영(眞影)을 모사(模寫)하...
-
포은 정몽주를 제향하는 전충사에서 올리는 제례. 영동 지역에 거주하는 포은 정몽주의 후손들이 매년 음력 4월 상정일(上丁日)에 강릉시 저동에 있는 전충사에서 올리는 제례이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말 충신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제관으로는 강릉시장, 문중대표 등이 참석한다. 1934년 후손 정기용(鄭起鎔)이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정몽주의 진영(眞影)을...
-
최치운(崔致雲)의 아내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씨(咸氏)의 묘비. 정경부인 함씨는 함세린(咸世麟)의 딸로 1392년 출생하였고 천성이 정숙하였으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21살에 최치운에게 시집왔으며 시댁에서도 효행을 몸소 실천하였다. 서거정이 비문을 지었으나 비석을 세우지 않아 소실되었다. 그러나 9세손 최정태(崔挺泰)가 우연히 두타산 삼화사에서...
-
조선 중기 선비인 정기평(鄭基平)의 묘비(墓碑). 정기평의 자는 정백(正伯)이고, 1584년(선조 17) 양주목사를 지낸 정약(鄭爚)의 아들로 출생하여 1629년(인조 7)에 졸하였다. 효행이 출중하여 부모상을 당하자 예제를 충실히 지켜 상을 치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이 한성부좌윤 및 예문관제학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인 것으로 보아 처음 세워진 것은 18세기로 추정된다....
-
조선 후기 강릉 정동면 지역에서 향약을 시행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 상호 부조와 신분간의 분수를 강조하는 면 단위의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조직되었다. 지방 장관인 수령 유후조가 절목을 작성하여 시행을 권장하였다. 향약의 4대 덕목을 앞세우고 각 덕목마다 시행 세칙을 마련하였으나, 이 세칙은 매년 열리는 총회에서 수정될 수 있었다. 도약정 1인, 부약정 1인, 직월 1인을 두고 운...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정선전씨의 시조는 전섭(全聶)이다. 전섭은 온조(溫祚)의 시종신하(侍從臣下)로서 부여에서 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십제공신(十濟功臣) 중의 한사람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전섭의 8세 손 전선이 백제에서 공주를 배종(陪從)하고 신라에 와서 봉익대부부지밀직사사전법판서(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典法判書)의 벼슬을 하였고 정선군(...
-
최시박(崔始鎛)의 처 정선전씨의 효열비. 최시박의 처 정선전씨는 시할머니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워 끼니를 제때 하지 못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정성스럽게 간호하였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자기의 모유를 짜서 공양하여 시할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후 시할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이밖에도 전씨는 남다른 부덕(婦德)으로 아들을 교육하여 진사시에...
-
조선 후기의 선비인 조석삼의 묘비. 조석삼[1813~1896]의 본관은 창령, 호는 황포(篁圃)이다. 조석삼은 1888년(고종 25)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그해 특별히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돈령도정(通政大夫敦寧都正)에 증직되었다. 1890년 다시 수직으로 가선대부돈령(嘉善大夫敦寧)에 증직되었다. 1893년 다시 수직으로 가의대부에 증직되었다. 1910년 후손 조인환...
-
주민의 대다수가 동일한 조상에서 파생된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촌락. 동족촌락은 생활공동체로서 동일 조상에 대한 제향, 마을 운영과 관련된 대동계, 동계(洞契)와 동약(洞約) 조직 및 관리, 문중서원과 사우의 건립 등을 공동으로 하고 있다. 종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족마을은 동성 동족의 족통과 경제적 근거를 기반으로 사회경제적 특권의 유지와 존속을 도모하였다. 따라...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창녕조씨의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계룡(曺繼龍)이다. 신라 진평왕의 장녀로 후에 선덕여왕이 된 덕만공주(德曼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강릉에 입향한 시조는 부원군파(府院君派)의 후손인 직장공(直長公) 조철(曺哲)과 창산군파(昌山君派)의 후손인 조학서(曺鶴瑞)이다. 조학서(曺鶴瑞)는 임진왜란 때 중...
-
조선 후기 김형진이 강릉시에 세운 누정. 18세기 후반 구산(丘山) 연어대(鳶魚臺) 위에 건립된 정자이다. 천연정을 건립한 김형진(金衡鎭)은 향리(鄕里)에서 높은 뜻을 세우고 은둔하면서 매학정(梅鶴亭)을 건립하였다. 김형진은 강릉 지방의 거성(巨姓)인 강릉김씨(江陵金氏)이며, 누대로 재산을 상속받아 재력을 갖춘 인물로서 백련거사(白蓮居士)라 불렸다. 김형진이 지은 시에...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한씨의 연원은 고조선 때까지로 올라간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準)의 후손으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이 있었는데 각각 기씨(奇氏),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가 되었다. 청주한씨의 시조인 한란은 우량(友諒)의 원손(遠孫)이다. 고려조에 삼중대광문하태위(三重大匡門下太尉) 벼슬을 했으며, 시호는 위양공(威...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최수황(崔守璜)의 아들이다. 최사립(崔斯立)은 고려 충렬왕대에 문과에 합격하여 예부전서(禮部典書)를 지냈으며, 글씨와 시에 능했다....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세건(崔世楗) 처 김씨의 성명·생몰연월일·자손의 성명 등을 기록한 돌. 최세건 처 김씨는 강릉김씨로 김세량(金世良)의 딸이다. 남편 최세건은 승문원 교리 최자점(崔自霑)의 아들로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냈다. 최세건 처 김씨는 1457년 출생하여 1535년 9월 1일에 병으로 졸하였다. 1535년 11월 30일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
-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에 있는 최세창(崔世昌)의 부인 강릉김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旌閭). 강릉최씨(江陵崔氏) 최세창의 처 강릉김씨는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남편에게 지극히 순종하였다. 남편이 죽자 며칠 동안 남편의 시신을 껴안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결심을 하여 치마 한 폭을 찢고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관에다 넣고 손가락의 피를...
-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강릉 12향현의 한 사람인 최수(崔洙)의 행적을 적은 묘비. 최수의 자는 도원(道源), 호는 춘헌(春軒)이며, 강릉 출신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유명하다. 통훈대부진잠현감(通訓大夫鎭岑縣監)을 지냈으며, 금란반월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으로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후손 최시복(崔始復)과 최주학(崔柱鶴)이 잘 전해지지 않던...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강릉최씨 필달계(必達系) 용연동파(龍淵洞派)의 파조. 자는 청수(淸叟). 강릉최씨의 시조 최필달(崔必達)의 20세손으로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지평현감(砥平縣監)을 지낸 최세번(崔世蕃)이다. 어머니는 이계저(李季著)의 딸이다. 현량과(賢良科)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낸 박공달(朴公達)의 딸과 혼인하였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용연동파의 시조인 최수담의 묘에 세운 비석. 최수담[1499~1582]의 자는 청수(淸叟),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지평현감을 지낸 최세번(崔世蕃)이고, 할아버지는 최진현(崔進賢)이다. 최수담은 박공달(朴公達)의 딸과 혼인하여 최인준 등 다섯 아들을 낳았다. 후손 최영대와 최종태 등 종인들이 묘소에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용연동파의 시조인 최수담의 묘비. 최수담[1499~1582]의 자는 청수(淸叟), 공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지평현감을 최세번(崔世蕃)이다. 현량과(賢良科)로 공조좌랑을 지낸 박공달(朴公達)의 딸과 혼인하였다. 최수담 사후 400여 년이 지나 묘표의 마모와 훼손이 심해지자 후손 최영대(崔永大), 최종태(崔鍾泰) 등이 논의하...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의 신도비. 강릉최씨 필달계 종중에서 최수성의 행적을 보존하고 추모하기 위해 1957년에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 입구에 있는 삼현비각 내에 있다. 삼현비각 서북쪽 산록은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으로 보은에서 이장해 온 최수성의 묘소도 함께 있다. 방형 비좌에 오석 비신이며, 지붕돌[옥개석...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군부정랑(軍簿正郞)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좌승지에 올라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최수황은 독실한 불자(佛者)로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또한 인...
-
조선 전기의 문신인 간재(艮齋) 최연(崔演)[1503~1549]의 신도비. 최연의 호는 간재(艮齋), 자는 연지(演之), 시호(諡號)는 문양(文讓)이다. 고려조 충숙왕 부마 문한공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최세건(崔世楗)이다. 후손들이 최연의 행적과 공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에 있다. 비제(碑題)는 "자헌대부한성판윤증시문양간...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 최응현 신도비는 1687년(숙종 4)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에는 신도비문 작성 경위,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의 상계와 조상의 공적, 수헌공의 행적과 후손들의 행적, 그리고 비명(碑銘)이 기록되어 있다. 최응현의 묘소에 비가 있었으나 오래되어 마모되자 후손들이 최응현의 행적을...
-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강릉최씨 입지계의 시조인 최입지의 신도비. 최입지(崔立之)는 강릉최씨 입지계의 시조이다. 최입지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다. 1844년(헌종 10)에 후손 최종태(崔鍾泰)·최양호(崔養浩) 등이 종인들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최입지 묘 근처에 있다. 비좌와 비두는...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자점(崔自霑)[1434~1508]의 묘비. 최자점의 자는 자흡(子洽), 호는 괴헌(槐軒), 부마(駙馬)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崔沇)의 아들로 1465년(세조 11)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 고성군수를 지냈다. 강원도 강릉시 교1동 강릉시외버스터미널 북쪽 산록에 묘와...
-
조선 전기의 선비인 최진현(崔進賢)[1424~1460]의 묘비. 1451(문종 1) 생원에 입격하였고 음사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부인은 죽산안씨 여흥부원군 안치강(安致康)의 딸인데 향년 30세로 졸하였으며, 이때 묘표는 동생인 수헌공(睡軒公) 최응현(崔應賢)이 찬하였다. 그리고 다시 강릉함씨 호장 함순(咸順)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최세번(崔...
-
최충남(崔忠南)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비. 최충남[1566~1616]의 자는 신부(藎夫), 본관은 강릉,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이다. 최충남의 나이 8살 때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아버지의 병이 낫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1796년(정조 20)에 7세손 진사 최구현(崔九鉉)이 선조의 효행을 전승하고...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치운(崔致雲)의 행적을 기록한 묘비. 강릉최씨 필달계 후손으로 조선 세종 조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의 상계(上系) 및 혼인관계, 출생과 관직경력, 후손, 명문(銘文) 등을 기록한 것으로 최치운의 아들 최진현(崔進賢)이 세웠다. 강원도 강릉시 대전동 즈므마을 강릉최씨 필달계 선영에 있는 최치운의 묘 앞에 있다. 비석의 총 높...
-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 최치운의 자는 백경(伯卿)이고, 호는 경호(鏡湖)·조은(釣隱)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이다. 1408년(태종 8)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412년(태종 12)에는 향유(鄕儒) 68인과 더불어 강릉향교 중건을 건의하는 공장(供狀)을...
-
강릉최씨 용연동파조(龍淵洞派祖) 최수담(崔壽潭)[1499~1582]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강릉시 사천면 중앙서로 865-8[사기막리 825번지]에 있다. 추모재는 강릉최씨 필달계 용연동파(龍淵洞派) 종친회 소유다. 최수담의 자는 청수(淸叟)이며, 공조참의에 증직되었고 강릉최씨 용연파조(龍淵派祖)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지평현감(通訓大夫砥平縣監)을 지낸...
-
1893년(고종 30)에 취영계(聚瀛契) 계원들의 모임장소로 건립된 정자. 강릉시 강문동에 있는 취영정(聚瀛亭)은 1893년(고종 30년)에 건립되었다. 건립주체 18명이 취영계원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계회를 열면서 시사(詩社)를 개최하거나 계원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정자는 방과 마루 각 1칸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
취영정에 걸려 있는 기문과 상량문. 호산(壺山) 정홍기(鄭鴻基)가 쓴 「취영정기(聚瀛亭記)」, 임인년에 작성된 「취영정기(聚瀛亭記)」, 윤서(潤西) 최원집(崔元集)이 쓴 「취영정중수기(聚瀛亭重修記)」, 하석(荷石) 최용근(崔龍根)이 삼가 쓴 「취영정상량문(聚瀛亭上樑文)」, 호산 정홍기가 찬한 상량문, 오월(梧月) 정봉화(鄭鳳和)가 삼가 쓴 「취영정중수상량문(聚...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리 남산재에 소재했던 정자. 취원정은 진사 최해웅(崔海雄)이 18세기 경에 건립하였다. 최해웅은 이 정자를 건립한 후 시를 즐기며 여생을 마쳤다.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최해웅(崔海雄)은 최도경(崔蹈景)의 현손으로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에게 배웠으며, 16세에 지은 「경포대」 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
-
칠봉(七峯) 함헌(咸軒)의 위패를 모신 사당. 칠봉 함헌은 1546년(명종 1) 간성군수(杆城郡守), 1552년(명종 7) 서장관(書狀官), 1553년 이천부사(利川府使), 1555년 강릉교수(江陵敎授), 1562년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다. 1552년 서장관으로 중국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영정과 「행단도(杏亶圖)」...
-
강릉시 왕산면 고단리 덕우산(德牛山) 아래 용소(龍沼) 언덕에 있는 정자. 칠연정이 자리 잡고 있는 덕우산 아래 용소는 약 5백여 년 전 문재(文才)와 기행(奇行)으로 유명한 생육신(生六臣) 김시습(金時習)이 은둔하였던 유지(遺址)로 전해지는 곳이다. 칠연정의 정명(亭名)은 칠연계(七聯契)에서 유래한 것이다. 칠연계는 해방정국 하에서 조국의 자주독립...
-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재지 씨족집단의 성씨에 대한 총칭. 강릉은 토성들의 재지적 기반이 강했던 지역이다. 토성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향리출신으로서 여말선초에는 신흥사대부를 성장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 초기 강릉 지방 성씨에 대해 “토성이 여섯이니 김(金)·최(崔)·박(朴)·곽(郭)·함(咸)·왕(王)이요, 사성(賜姓)이 하나이니 옥(玉)이...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강릉 지역에 거주하는 평해황씨는 중국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한학사(漢學士) 황락(黃洛)의 후손들이다. 황락은 사신으로 월국(越國)으로 가는 도중 표류하여 경상북도 평해 월송정 인근에 상륙하였다. 황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황갑고(黃甲古)는 평해황씨 시조, 둘째 황을고(黃乙古)는 장수황씨 시조, 황병고(黃丙古)는 창원황씨...
-
시호(詩湖) 박원동(朴元東)이 시주(詩酒)로 소요하던 정자. 풍호(楓湖)는 경호(鏡湖)와 함께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석호이다. 1605년 강릉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던 정경세(鄭經世)는 연꽃이 만발한 풍호의 자연경관을 경호와 비교하며 “넓고 아득하기는 하늘과 같고 밝고 시원스럽기는 선경(仙境)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절승(絶勝)에 놀라네.”라는 시를 남겼다....
-
하평마을의 민속놀이로 강릉사천하평답교놀이가 있다. 하평답교놀이는 강릉의 자연적 환경 속에서 생성된 대표적인 농경 민속놀이라 할 수 있다. 이 놀이는 조선시대 집촌화 시대 이후 자연촌의 독립이 이루어지면서 발생한 놀이라 하겠다. 이는 수도작 재배 중심의 노동집약적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시와 결합된 대동놀이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
이런 세시풍습뿐 아니라 하평마을에서 지켜오고 있는 민속적인 전통들 역시 다양하다. 논, 밭의 김을 두세 벌 매고 나면 음력 6월말 7월초가 되는데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삼복더위가 들어있는 때다. 이때쯤이면 농촌에서는 큰일이 대충 끝나는 때이므로 조금은 한가한 시기가 된다. 농가에서 김매기에 필요한 호미가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되어 호미를 씻어둔다 하여 ‘호미 씻기’ 또는 ‘질먹기’...
-
하평마을의 마을신앙으로는 서낭당과 안택고사가 있다. 사천진리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소나무 3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들을 마을에서는 서낭당으로 모시고 있다. 소나무는 새끼줄에 문종이를 달아서 감아 놓았으며 그 주위에 벽돌로 담을 쌓았다. 모시는 신위는 성황지신, 토지지신, 여역지신이고, 정월 초정일에 마을 주민들 중 가장 연장자들이 주관하여 제례를...
-
...
-
하평마을은 전래의 세시풍습이 현대의 생활 속에 남아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해마다 치르는 각종 세시풍습들을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정월 대보름이면, 초저녁달이 뜨기 전에 횃불을 만들어 산에 올라가 달을 맞는다. 달이 떠오르면 환성을 지르며 횃불을 든다. 달에게 자기의 소원성취를 빌며 절을 하기도 하고 달빛을 보며 점을 치기도 한다. 달빛이 붉으면 가뭄이 들고,...
-
하평마을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일화가 남아 있는 것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운양초교 아래에서 옛 철길까지의 넓은 들을 향교평(鄕校坪)[생계들]이라고 한다. 옛날 이 논이 강릉향교의 소유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 논 부근에 12가구가 살았으나 병자년 포락 이후 모두 이사하여 지금은 그 터가 다 논이 되었다....
-
하평마을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들을 정리해본다. 먼저 이설당(梨雪堂) 김광진(金光軫)[1495~?]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임(子任)이며 본관은 강릉 사천이다. 아버지는 김세훈(金世勳)이고, 형은 동지중추사 김광철(金光轍)이다. 1526년(중종 21) 생원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37년 시강관이 되어 궁중의 법률을 엄격하게 할 것을...
-
농경 민속문화가 잘 보존된 강릉시 사천면 하평리의 생활 문화와 민속놀이. 하평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농촌마을이다.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주민들의 삶 속에는 농사와 관련된 다양한 풍습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세시풍습, 민요, 민속놀이부터 각종 금기들까지, 인근 마을에서 현재는 사라져가는 농경 민속문화들이 지금까지 보존, 계승되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교산(蛟山) 허균(許筠)[1...
-
하평마을은 예전에 초당 허엽의 아들인 하곡(荷谷) 허봉이 이곳에 살아서 그의 호를 따 하평동이라 하였다. 마을에는 허엽의 장인이고 허봉, 허균, 허난설헌의 외조부이기도 한, 조선 중종 때 문신 김광철의 옛 집터가 있는데, 그의 호를 따 애일당(愛一堂)이라 부른다. 애일당이 있는 뒷산 형국이 도롱뇽이 누워있는 것 같아서 교산이라 했으며, 애일당의 외손으로서 「홍길동전」을...
-
하평마을은 강릉시 북쪽 10km 지점인 강릉과 주문진의 중간 중북부에 있다. 경도 및 위도상으로 본 사극(四極)은 극동동경 128°53′ 극서동경 128°44′ 극남북위 37°51′ 극복북위 37°44′로서 동쪽으로는 연곡면에 접하고 있다. 주민의 생활권이 강릉시에 속하여 강릉시에서 각 마을로 통하는 시내버스 노선이 9개 노선이나 되며, 7번국도가 면소재지를 통과하고 있...
-
하평마을에는 눈에 띄는 큰 바위들이 많은데, 그 바위들에 얽힌 사연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뒷장[후도(後島)]은 뒷섬 앞에 있는 큰 바위섬으로 영락대 조금 위쪽에 있는 바위이다. 조류 때문에 어떤 때는 신발을 벗지 않고 갈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배를 타야만 갈 수도 있다. 진리 축항 공사 때 이 바위를 깨뜨려 쓴 다음부터 마을에 재앙이 자주 일어났다고...
-
하평마을의 총면적은 70.78㎢로 농경지 면적은 11.6㎢로, 그 가운데 밭 3.1㎢ 논 8.4㎢으로 논농사의 비율이 높다. 행정구역은 법정리 9개리, 행정리 15개리와 79개 반 및 5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하평마을 동쪽으로 진리와 동해 바다, 남쪽으로는 방동하리와 미노리, 서쪽으로는 판교리, 북쪽으로는 연곡면 동덕리와 인접하였다. 하평리의 가구수는 139가구...
-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성씨.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조에 조산대부첨의중서사(朝散大夫僉議中書事)를 지냈으며, 용진(龍津)에 정착하여 세거하다가 조선 개국 때 한양으로 옮겨 살면서 많은 명신, 명유를 배출하였으므로 관향을 한양으로 삼았다. 강릉 냑향시조 조공근(趙公瑾)은 조지수의 12세손으로 호는 소흡(梳翕)이다. 조공근은 임진왜란 때 봉묘사주(奉廟社主;...
-
1945년 해방 직후 발생한 강릉 지역에서의 좌, 우익 간의 이념 갈등. -사상이 낳은 정치적 혼란- 해방 직후 강릉 지역 좌우익의 갈등-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으나 강릉 지역의 일본군은 계속 무장한 채로 주둔하고 있었다. 2주일이 지나도록 미군은 오지 않았고, 하루 바삐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의지가 강했던 시민들은 38선 이북 양양에 이미 주둔해 있던 소련군에게 일본군의...
-
강원도관찰사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건립한 해운정(海雲亭)에 있는 기문. 해운정에는 안동(安東) 권진응(權震應)이 쓴 「해운정중수기(海雲亭重修記)」, 동양(東陽) 신헌조(申獻朝)가 지은 「해운정중수기(海雲亭重修記)」, 송시열(宋時烈)이 쓴 「정부자영당기(程夫子影堂記)」 등 3개의 현판이 있다. 권진응이 지은 「해운정중수기」는 1530년(중종 25) 해운...
-
조선 중종조 문신인 어촌 심언광의 별당에 걸려 있는 시문 현판. 해운정에는 명나라 사신인 공용경(龔用卿),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박광우(朴光佑), 김창흡(金昌翕) 권숙(權潚), 심순택(沈舜澤), 이헌위(李憲瑋), 한정유(韓廷維), 윤봉구(尹鳳九), 채지홍(蔡之洪), 이민서(李敏叙), 일완(日暖) 낙중(樂仲), 조경망(趙景望), 김진상(金鎭商), 송규...
-
조선시대의 강릉 지역에 있었던 향촌 규약이나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 이율곡(李栗谷), 최도경(崔蹈景) 등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기 전에 김윤신(金潤身)에 의하여 1506년에서 1521년 사이에 강릉 지방에 이미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관동지(關東誌)』 권10, 『강릉부읍지(江陵府邑誌)』「김윤신조(金潤身條)」에는 '1476년(성종 7)에 문과에 등제(登第...
-
조선시대 선비인 홍인국(洪仁國)의 묘비. 홍인국은 남양홍씨 시조 홍은열의 21세손으로 생원이었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산북리 묘소 인근에 묘제를 위한 전청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홍인국의 아버지는 홍충양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이다. 부인도 강릉김씨이다. 후손 홍재민(洪在珉) 등이 홍인국의 가계와 행적을 정리하여 세웠다. 건립시기는 병자년 윤3월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
강원도 강릉시 저동 경포대 호숫가에 홍장(紅粧)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위. 고려 말 강원도 순찰사로 강릉에 머물러 있었던 박신(朴信)이 강릉 출신인 기생 홍장과 함께 배를 타고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전하며, 경포팔경 가운데 하나인 ‘홍장야우(紅粧夜雨)에 해당되는 바위다. 강릉 기생 홍장과 박신의 사랑 이야기와 관련된 바위라는 뜻의 이름이다. 경...
-
국토의 황폐화 방지와 화전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화전을 정리한 사업. 한국전쟁 이후 국토의 황폐화와 풍수해를 방지하고 산업발전의 기반으로서 산림자원 조성과 자연환경보호 그리고 화전경작민(火田耕作民)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산간오지의 화전을 정리한 사업이다. 화전은 산림에 불을 놓거나 기타 불법적인 방법으로 수목 및 지피식생을 제거한 그 적지에 무시비 경종법에 의해 수년간 작물을...
-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모안이굼에 있던 조선 시대의 정자. 환선정(喚仙亭)은 16세기 후반경 권협이 지은 건물로 아들 권수경, 손자 권칭(權稱)에게 물려준 누정 건축물이나, 지금은 없어졌고 그 터만 전해지고 있다. 환선정과 관련된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권칭이다. 권칭은 안동 권씨로, 강릉 지방의 사족이었으며, 1627년(인조 5) 증광 초시 생원에 입격하였고,...
-
강릉시 오죽헌 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군옥의 시를 황기로가 초서로 쓴 서예 작품. 「황기로 초서-이군옥시」는 2010년 1월 14일 보물 제1625-1호로 지정된 황기로(黃耆老)[1525~1575]가 쓴 서예 작품이다.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 황기로가 당나라 시인인 이군옥(李羣玉)의 오언 율시를 초서로 쓴 것이다. 황기로는 조선 전기의 서...
-
정곤(鄭鵾)의 처 강릉최씨(江陵崔氏)의 열녀각(烈女閣). 집에 큰불이 났을 때 시어머니는 미처 집에서 피해 나오지 못했다. 이때 최씨는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시어머니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부인은 시어머니를 껴안은 채 함께 죽었으며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시신은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려 손에 낀 가락지로 식별하였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열...
-
권학필(權學弼)[1894~1962]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권학필은 안동권씨이다.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4형제의 막내로 성장하면서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였다. 11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애통해 함이 남달랐으며, 형들의 가르침에 따라 상례를 치렀다. 이후 가세가 빈약하여 맏형을 따라 왕산면으로 이...
-
김형중(金衡重)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 김형중은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1839년(헌종 3) 여름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김형중의 아버지도 전염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에 김형중은 아버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간병하였으며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아버지에게 마시게 하였다....
-
남한복(南漢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 남한복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잃은 통한의 서러움에 복받치곤 하였다. 남한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알지만 나는 모른다.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부를 줄 알지만 나는 모른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천지간(天地間)의 죄인이라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남한복은 비바람...
-
박억추(朴億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박억추는 충렬(忠烈) 박제상(朴堤上)의 후손으로 훈도(訓導) 박윤량(朴允良)의 아들이며 삼가(三可) 박수량(朴遂良)의 조카이다. 이 가문에서는 박수량과 사휴(四休) 박공달(朴公達)과 같은 효자들이 배출되었으며 박억추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효성이 지극하였다. 『삼강행실』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
서하순(徐夏淳)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서하순은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간병에 피를 빨고 대변 맛을 보면서 지성으로 효행을 실천하였다. 추운 겨울에도 어머니가 생채를 먹고 싶어 하면 눈 속을 헤치고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나물을 캐어 봉양하였다. 임종을 당하여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서 어머...
-
이동규(李東奎)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이동규의 아버지 이선빈(李善彬)은 풍수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어느 해 한 상가(喪家)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그 묘자리가 공교롭게도 그 상가의 종인 개산(介山)의 아버지 묘자리와 가까웠다. 그러자 개산(介山)은 이선빈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이후 개산(介山)은 남몰래 이선빈을 독살하였다. 이동규는 아...
-
최기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최기원(崔起元)은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사석(師席)이었으며 강릉 향현사에 배향된 수헌(睡軒) 최응현(崔應賢)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스럽게 섬겼다. 최기원이 8살 때 부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소생케 하고, 이러한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1608년(선조 41)...
-
최응록(崔應祿)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최응록은 중종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효행이 지극하여 정릉참봉(定陵參奉)에 천거되었다. 최응록의 호는 성재(省齋)이다. 희경공(僖景公) 좌찬성(左贊成) 최이(崔迤)의 6세손이고 아버지는 최숙남이다. 최응록은 아버지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에다 섞어 드시게 하여 병을 낳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