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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2 - 나 없으면 저이가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D020304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1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영숙, 조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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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2(한복실)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집을 나가기 위해 보따리를 여러 번 쌌지만, 남편 때문에 나가지 못하고 매번 보따리를 풀어야만 했다.

“뭐 달아날라고 보따리 수없이 쌌는데. 갈라면은 우리 아저씨가 불쌍해서 들어오고 그랬다구. 나 아니면 자기가 혼자 사니까, 아저씨는 잘하잖어. 그러니깐 미련이 있어서 못 가고 돌아오고 돌아오고. 서울도 갔다가 살라고 가봤다가 돌아오고 돌아오고 했지. 그러다가 자식 낳으니깐 할 수 없이 사는겨”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먹더라도 시집살이가 너무 심해서 마음고생을 하다 보니 젖이 제대로 불지 않아서 큰 아들에게 젖 한 번 제대로 물리지 못했다. 그래서 큰 아들이 너무 가엽게 컸다며 지금까지도 마음이 안쓰럽다고 하였다.

“하도 시어머니가 들들 볶아선 애가 이렇게 말랐어. 내가 못 먹으니깐 젖이 안 나오잖아. 그래가지고 동네 단물을 얻어다 먹이고. 이전엔 냉장고도 없잖아. 그래가지고 우물에다가. 바께스에다 끈을 달아가지고 거기다가 해놓잖아. 동네거를 다 얻어다가 그냥 그 두레박에다 해가지고, 우물에다 담가놨다가 먹이고 그랬어. 지금은 설탕가루지 예전엔 삭가루야. 그거 타가지고 먹이고”

남편과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집을 나가려다가도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그러다 하루는 너무 힘이 들어서 마음을 크게 먹고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왔다. 친정으로 가니 친정어머니가 도로 돌아가라고 하고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못 살게 해서 서울로 갔죠. 가가지고 서울 가서 안 받아줘. 아는 집에서도 안 받아줘. 도로 내려왔지. 애가 젖을 못 무니깐 다 죽어갔지. 애를 데리고 나왔는데 못 얻어먹으니깐 젖이 안 나오는겨. 그래가지고는 인제 또 살라고 왔는데, 시어머니가 그래도 뭐라 그래요. 그래가지고는 그냥 여기 정미네 집이. 그 집에다가 마루에다가 누여놨어요. 그랬더니 사람들 다 안 만져봐. 애가 죽을라고 그러니깐. (중략) 그렇게 해서 있다가는 안 되겠어서, 애를 놔두고 인제는 진짜 애를 놔두고 가는겨. 놔두고 가는데, 세상 발이 떨어져야지. 애는 둘째고 또 저이. 나 없으면 저이가 어떻게 살지 그거 생각에. 그래서 사나봐. 애는 애고 또. 그래 또 걸어 들어와서 그냥 사는 거여”

시어머니는 한복실 할머니가 첫 손주로 아들을 낳았어도 이뻐해 주지 않았다. 시동생의 자녀만 이뻐하고 한복실 할머니의 자녀들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았다.

“자기 손자가 아니래. 아니라고 안 안아줘요. 난 처음 봤어요. 처음 봤어. 해꼬지는 안하더라고. 뭐 따로 이러더래도 치지는 않더라도. 근데 저기는 작은 아들 손자는 이뻐서 죽을라고 그러더라고. 시집살이 할 때, 동서하고 같이 시켰어요. 시집을 내가 늦게 왔잖아. 동서는 먼저 오고. 한번은 조카가 덩치 좋은 애는 저기 동서는 생극서 살고 우리는 여기서 살고 근데 거기는 집도 좋아요. 내가 시집올 때 선보러 올 땐, 그 시동네 집만 왔다가니까 거기가 좋은 거니까 시집을 온 거야. 이 초가집은 못 봤지. 그래가지고 덩치 좋은 거 업으라니깐 하는 얘기여. 우리 어머니가. 그래가지고 둘이 손잡고 있다가도 내가 들어서 오면은 돌 던지라고 해가지고 혼났지. 그래서 나 돌로도 맞고 그랬어요. 그렇게 손자까지 시켜가지고 돌 던지라고 그러고. 그래도 견뎌서 살았으니까.”

당시에 시동생은 건설업을 하고 있었고 한복실 할머니 시댁도 먹고 살 만한 정도였는데 한복실 할머니가 시집을 온 해에 가세가 기울어서, 시어머니는 그 탓이 모두 한복실 할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시집살이를 더 호되게 시켰던 것이다.

“왜 그러냐면 나 오는 해에 그렇게 잘 살지는 않았어. 그냥 먹고 살았는데 내가 가을에 왔거든. 그걸 밭을 여기저기 많이 사놨다가. 그해 김장을 텄다가 망했어. 싸가지고. 그래서 다 들어먹었어. 그랬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 들어와 가지고 망했다고 내쫓으라고 그때서부터 미워하는 거야.”

그렇게 시집살이를 참아가며 시어머니와 10여년 정도를 살다가, 시어머니가 짐을 싸서 무극으로 나가셨다. 절에 들어가서 본인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불공을 드리며 살다가 건강이 허약해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안 나가니까 어머니가 당신 살림살이를 리어카에다 실고 다 가지고 저 무극으로 금왕으로 가서 살았어. 혼자서. 그래가지고 어머니 나가는 바람에 내가 이렇게 사는겨. 그래가지고 무극서 관에서 살다가 모시러 가도 안와. 관에서 살다가 충주로 가가지고 절에 가서 도 닦고. 자기가 하는 죄를 자기가 도 닦는다고 충주 절에 가서 있고. 그래가지고 절에서 있어도 방은 따로 얻어놓고 있는데. 생신 때는 가서 생신 해드리고 그랬다고. 그랬는데 차가 트럭이 와. 짐을 실고. 그래가지고 돌아가시려고 그러니깐 모시고 왔나봐. 우리 어머니를. 와가지고 일 년 있다가 돌아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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