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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여 더욱 빛나는 웃음꽃(황경모 할아버지 부부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B020300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경수, 고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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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모 할아버지 부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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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모할아버지, 이복연할머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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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모할아버지, 이복연할머니2

늘거리 에서 나고 자랐다는 황경모 할아버지(82세)는 현재 둘째 아들인 이장 황경구(42세) 씨와 함께 살고 있다. 늘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보이는 2층으로 된 커다란 집이 황경모 할아버지 댁인데, 이장님도 뵐 겸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했고 명절 끝이라 가족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손자 손녀가 많아서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하니, 할아버지는 “허허, 그럼 요것들 보고 있으면 하루가 금방 가.”하며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띠었다. 황경모 할아버지와 이복연 할머니(75세)는 늘거리에서 가정을 꾸리고 산 지 5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문촌리에서 나고 자랐고, 할머니는 시집을 왔지만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모습에 대해서 궁금하여 두 분이 살아온 이야기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다.

이복연 할머니는 충주 소태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1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큰 오빠가 장가를 간 후 소태면에 자리를 잡았는데 조카를 봐달라고 해서 청주에 같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16세에 할아버지와 혼인을 하였는데 할아버지 나이는 23세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신랑도 한번 못 보고, 가마를 타고 와서 시집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의용군 동난 난리와 6·25사변을 겪었으며 친청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얼음 빙판을 걸어 피난을 경상도까지 갔다고 한다. 또한 할머니가 18살 때 할아버지가 의용군을 가서 수술을 하는 큰일도 겪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퇴원을 하신 후에 서울에서 걸어서 음성까지 왔다고 한다.

특히 문촌리에서 태어나 자라왔다는 할아버지께, “어릴 적에 특별히 하던 놀이 같은 건 없었나요?” 하고 여쭤 보니, “어릴 적에 뭐 친구랑 여름에는 개울에서 멱 감고, 고기 잡고, 겨울에는 얼음판에서 스케이트타고 쥐불놀이도 하고 그랬지.”라고 하며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듯 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잘 하지 않는 쥐불놀이에 대해 “쥐불놀이는 왜 했던 거예요?” 하고 여쭤보니, “거거 쥐불놀이 하면서 그 불이 그게 살충제였어. 벌거지들 다 죽고 불을 놓으면 좋았어. 우리는 주로 논빼미에서 잘 놀았지.”라고 하였다. 옛 어르신들은 놀이 하나도 살충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지혜가 새삼 놀라웠다. 현재 왜가리 번식지가 자리한 곳이 문촌리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놀던 논빼미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마을의 주 생산업이 복숭아농사여서 논이 어디 있나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주로 논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살림이 괜찮았는데 큰형님께서 재산을 탕진하여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큰형님은 이후 중국에 갔고, 현재의 삶은 할아버지께서 모두 이룬 것이라고 하였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아버지가 가정을 꾸린 이야기도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자제 분이 어떻게 되세요?”

“애들? 8남매야. 맏이는 아들 황진구 서울에 살고, 둘째가 여기 이장 황용구, 셋째가 황희구 그리고 딸이 다섯인데 서울하고 충주에 살고 있어.”

그리고 형제 분과 친척 분들이 모두 문촌리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명절 때의 차례 이야기를 해주었다. 구정에 지내는 차례는 조카인 황경구 할아버지 댁에서 한 번, 황경모 할아버지 댁에서 한 번, 당질의 집의 순으로 차례를 지낸다고 하였다. 축문은 구정과 같은 명일에는 쓰지 않으며, 기제사 때에는 사용한다고 하였다.

또 명절 때, 정월 오후에는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 지내는 풍습이 있는데 이를 ‘상오’라고 한다고 한다. 이 풍습은 군에서 지원하는 행사이지만 올해는 군에서 지원이 없어 상오를 지내지 않을 거 같다는 말을 하며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할아버지는 복숭아농사를 하기 전에 논농사와 담배를 같이 했다고 한다.

“논농사하고 담배농사를 같이 하신 거예요? 두 가지를 동시에 하면 어렵지 않나요?”

“봄에 담배를 심고 논을 멘 후에 담배를 따고, 쪘어. 이게 일이 겹치지가 않는다고.”하시며 논농사와 담배농사에 대해 말해 주었다.

황경모 할아버지는 문촌리에서 태어났지만 농사도 지었고, 또 젊은 시절에는 타지에 나가서 살다가 다시 문촌리로 들어왔다. 강원도에 27세쯤에 나가 의장을 짜는 목수 일을 10년 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논을 사 논농사를 짓는 것이라 한다. 문촌리로 본격적으로 들어와서는 밭농사(벌이농사), 담배 10년을 하다가 자식들이 자랄 때에는 수입이 가장 큰 사과 과수원을 10년 정도 하고, 복숭아 과수원을 시작하여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형제는 3남매였으며 근처 아래 오갑에 큰 누님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자식은 아들 3명, 딸 5명으로 8남매를 두었고 둘째 아들이 복숭아농사를 물려받아 하고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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