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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에 속하지만 일찌감치 개화가 됐어요(마을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A020100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경수, 고유리

갑산리는 본래 충주군의 소파면 지역으로 갑산의 밑이 되므로 갑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갑산1리, 갑산2리를 병합하여 갑산리라 하여 음성군 소이면에 편입되었다.(음성군 지명지 참조) 마을 유래비에 의하면 ‘갑산1리 마을은 고려 때 봉산읍 소재지로서 탑골말, 정산말, 정자안, 평짓말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 금봉산을 중심으로 주변 자연 경관이 뛰어나며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 시부터 갑산리라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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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유래비

갑산1리에서 만난 연방계장 정기용 할아버지(74세)의 말에 따르면 갑산리는 다른 마을과 달리 마을의 공동소유재산이 있다고 한다. 마을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현대적이고, 시설도 잘 되어 있는 편이어서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한 것인지 궁금하여 마을의 공동재산 여부에 대해서 여쭤 보았다.

“응, 여가 밭 1200평, 회관 주변 땅이 한 1000평, 논 1100평 정도가 될껴.”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갑산리마을의 공동재산은 모두 약 3,300평 정도가 된다. 타 마을에 비해 이는 상당히 많은 양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현재 갑산1리의 이장을 맡고 있고 정자안에 살고 있는 권오귀 이장(46세)을 만났다. 마을의 공동재산에 대해서 여쭤보니, 거실에 놓인 찻상에서 차를 따라 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을 공동재산? 그거 그거, 원래는 안동권씨 꺼야. 일본놈들이 들어오면서 안동권씨가 땅이 너무 많다고 빼앗았어. 빼앗긴 후에 일본놈들이 돈 있는 사람들한테 팔아서 개인소유가 됐다가 해방 후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찾은 거지 뭐.”

“공동재산이라고 하지만, 모 본래는 안동권씨 거지 뭐.” 이장은 지금 마을의 공동재산인 땅이 어떻게 공동소유가 되었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안동권씨의 땅이 이 근처에 굉장히 많았는데 모두 팔고 남은 것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동역마을 에서는 갑산리에서 77년 이상을 살아오신 권오성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직접 보았던 동역마을의 역사적인 이야기들에 대해서 자세히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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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성할아버지의 동역마을 역사적이야기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80년을 사신 갑산리 자랑 좀 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갑산리의 자랑으로 들려준 이야기는 마을의 옛 인물인 김구수, 민참영에 관한 이야기와 소이초등학교의 전신인 ‘동숙학숙’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주 작고 깊은 골짜기 마을이었지만 어느 곳보다도 일찍 개화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동네는 굉장히 오지에 속하는 땅이예요. 그래도 이 동네가 일찌감치 개발이 됐어요. 나는 못 봤는데 이 동네에 옛날에 퇴직한 고급 관리들이 여기 와서 살았어요. 김승지라고 옥당 승진데 아마 그분이 아마 정3품 정도 될 거예요. 그분이 퇴역을 하고 여기 와서 살았어요. 그분을 내가 봤어요. 그분이 엄청 엄격하셨어. 상투를 했고 손자들도 머리 꼬랭이를 해서 내가 잡아당기고 했어. 경찰서장이나 군수가 바뀌면 그분한테 와서 인사를 했대요. 그분이 외출할 때는 패랭이라고 있어. 쪼그만 할 때보면 ‘승지영감 가신다.’라고 하면 어른들이 피하더라고 워낙 엄격하니까. 그땐 패랭인가 뭔지 몰랐지. 관리들은 금관조복을 하는데 ‘나라 잃은 백성이 어떻게 금관조복을 하느냐, 패랭이도 만족하다.’했던 거야. 그분이 아주 청백리로 유명한 분이에요.”

그리고 곧바로 민참영이라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민참영은 동역마을에 살았던 당시 보기 드문 개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민참영이라고 하는 분이 살았는데 그분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감리교를 세웠데요. 민홍식 형제가 막대한 자본을 들여서 교회를 지어서 아버지께 헌납한 거예요. 지금도 교회 자리가 있고 교회 가면 민참영의 사진이 있고. 가까이에서 맨날 교회를 다녔다고 해요. 이분이 참영인데 구한말의 개화당 계통이니까 대원군 시절에 기독교를 얼마나 탄압을 했어요. 이분이 기독교를 믿는 걸 보면 개화당 아닐까 생각을 해요. 그래서 교회가 되니까 서양 선교사들이 다녔거든요. 멀리 교회를 다니고 했는데 머리 가르마를 옆에다 타고 다니는 걸 봤거든, 옛날에 우리 정숙한 아낙네들은 어디 그렇게 가르마를 타고 다녀요. 신여성이야. 가르마를 타고 말이지 통치마를 입고. 그리고 이 동네에 학교가 있었어요. 동숙학숙이라고. 거기 다녔던 분들이 지금까지 살았으면 100살 된 사람이거든. 우리 당숙이 다녔었는데. 현대지리, 산학 지금의 수학이예요. 동숙학숙을 세운 이유는 ‘아는 게 힘이다’ 아녜요? 그 때 다 무지몽매하거든. 그래도 머리를 깨워서 일본놈들한테 대항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할아버지는 갑산리에 훌륭한 인물들이 있었다는 말을 해 주었다. 또한 안동권씨 문중에 대한 말을 빼 놓지 않고 이어나갔다.

“우리 권문에서 영명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웠어. 4년제여. 해방 직전까지 있었어. 우리 같은 사람도 다녔고,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월사금이 있었어.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61전 냈었어. 그것도 못 내던 사람들은 학당에 다닌 단 말이야. 소학교 다니는 사람도 있고 거기를 못 갈 형편은 갑산 1구에 있는 영명학당에 다녔어요. 학당의 이사장이 권문의 종손이 이사장이었지. 나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1년을 댕겼어. 그렇게 하고 또 애림계라고 하는 계가 있었어. 나무를 사랑하자고 하는 계가 조직이 되어 있었어. 군유림을 받아서 관리 하는데 애림 표시를 하고 함부로 못하게 하고 가을이 되면 동네사람들 수만큼 표시를 해 줬어. 이장하고 다니면서. 그런 걸 보면 이 동네가 교회의 영향이라든지 김승지가 와 있어서 오지지만 일찍 개발이 된 동네가 아닌지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갑산리에 살아오면서 보았던 갑산리 동역마을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굉장히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고, 권씨 문중의 자손으로서 마을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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