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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333
영어의미역 Traditional "five-day market" (oiljang) of Eumseong for the taste and style of the days gone by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개설]

장시(場市)는 조선 사회의 봉건 경제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던 자급자족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급할 수 없었던 물품이나 지역적 특산물을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또한 장시는 지방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생산자층에 의한 상품 생산과 상인들에 의한 유통 등 교역 장소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조달할 수 없었던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장소이자, 교환과 매매가 이루어지던 장시는 조선 초기까지는 장문(場門)으로 불렸으나 대개는 장(場)이라고 편하게 불렀다.

음성 지역에서 현재까지 전통 오일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음성읍내장무극장으로 불리는 금왕장, 대소장, 삼성장, 감곡장 등 다섯 곳이다. 음성 지역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곳이자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이들 오일장들은 현대에 들어와 더욱더 옛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장시는 언제 개설되었나]

장시는 15세기 말 전라도에서 처음 형성된 이래 1516년(중종 11)에 충청도에 개설되고, 이어 경상도에도 개설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는 읍치(邑治)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서도 거의 일반화되는 등 전성을 이루게 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예규지조(倪圭志條)에 따르면 전국 팔도의 장시 수는 1,052개 소로 나온다. 또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1,061개 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073개 소로 기록되어 있다.

한일합방 당시 전국의 장시는 1,607개 소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렇듯 장시는 지역 주민과 농민에게 경제 생활의 필수적인 기반이면서도 상품 유통의 주도적인 역할까지 담당하며 전국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음성 지역 장시의 형성]

음성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6세기 이후 장시가 개설되는데, 시기마다 개설되는 장시 수는 달랐다. 1770년대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음성읍내장(陰城邑內場)과 우목장(牛目場)·무극장(無極場) 등 세 곳의 장시가 기록되어 있으며, 1830년대에 저술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읍내장·무극장·한천장(漢川場) 등의 장시가 기록되어 있다.

『임원경제지』 이후 장시 개설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는 1872년에 작성된 「음성현지도(陰城縣地圖)」와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이다. 그런데 「음성현지도」에는 읍내장만이 기록되어 있고, 「충주목지도」에는 한천장이 폐지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무극장은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이들 군현지도는 당시의 장시 개설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지는 못하나 장시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후 음성 지역의 장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1901년에 작성된 『한국충청북도일반(韓國忠淸北道一斑)』으로 읍내장과 한천장, 무극장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충청북도일반』에도 나와 있듯 음성 지역 장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세 곳 정도가 유지되는데, 이 장시 수는 전국의 군·현별 평균치 3.2개 소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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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지역의 장시 수

이렇듯 세 곳의 장시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음성 지역의 장시 밀도와 경제 규모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더 이상 장시 증설 요인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930년대로 들어오면서 음성 지역의 장시 수가 일 곱 군데로 급격히 증가하여 1937년에 작성된 『음성읍지(陰城邑誌)』를 보면 읍내장과 무극장, 한천장, 보천장(甫川場), 정천장(呈川場), 덕정장(德井場), 왕장장(旺場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30년대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경제 규모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장시가 늘어나자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아져, 당시 음성 지역 총 가구 수와 인구 수가 9,367호에 67,231명인데, 이 가운데 상업에 종사하는 가구 수는 558호에 2,825명으로 전체 인구의 5.8%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음성 지역의 장시권]

음성 지역 장시들도 다른 지역 장시와 마찬가지로 장시들 간에 장을 여는 날을 달리하여 장시권(場市圈)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장시권은 일정한 권역 안에서 상설 시장의 효과를 갖고 있었다. 장날을 달리할 경우 장시 밀도와 규모에 따라 위계가 이루어져서 대장(大場), 곧 큰 장은 같은 장시권의 소규모 장시에 출시된 잉여 물자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기도 하고, 장시권 내로 들어오는 물자를 배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음성 지역의 큰 장은 읍내장이었다. 읍내장이 가장 먼저 개설되었고, 그 후 주변의 장시가 장시일을 달리하였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읍내장은 2·7일, 한천장은 1·6일, 무극장은 5·10일에 각각 열렸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읍내장이 2·7일, 왕장장이 3·7일, 보천장이 4·9일, 무극장이 5·10일, 한천장이 1·6일, 정천장이 3·8일, 덕정장이 4·9일에 각각 열리면서 연속적 장시 이용이 가능하도록 장시망이 형성되었다.

『한국충청북도일반』에 나와 있는 음성 지역의 상품 수출입지는 충주·장호원·음죽·반천·청안·제천·서울이었고, 상품 수입지는 충주·반천·괴산·제천·서울 등이었다. 원격지 유통은 대부분 장호원을 경유하는 육로 운송에 의존하였으며, 중심은 충주장이었다. 또한 괴산장-청안장-진천장-음성장이라는 순회로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괴산장이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는 괴산장이 음성장을 비롯한 다른 장보다 장시에 모여드는 인구가 많아 거래액이 컸기 때문이다.

[전통시대 음성 지역 장시들]

1. 음성읍내장

음성읍내장음성읍읍내리에 있던 장시로, 음성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개설되었다. 음성읍내장의 개설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70년대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장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1830년대에 저술된 『임원경제지』와 1870년대에 제작된 「음성현지도」에도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장시가 개설된 이래 계속 존속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음성읍내장은 1872년에 제작된 「음성현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원역(坎原驛)이 있던 역말 앞에서 열렸다. 그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오늘날 읍내리 신장호상가 맞은편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2·7일에 열렸던 음성읍내장은 괴산대장권(傀山大場圈)에 속하여 괴산·진천·용안·한천·보천·무극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장사를 하였고, 다음날 괴산장이나 정천장, 대소원장으로 이동하였다. 음성읍내장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읍내리소이면, 원남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음성읍내장의 장시 규모는 1909년 작성된 『한국충청북도일반』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점상이 5개 소, 주막이 8개 소, 노점상 및 보부상이 10명이며, 장날 모이던 인구 수는 약 5백 명, 장날 거래 금액은 3백 원 정도였다. 음성읍내장의 주요 매매 물품은 쌀, 보리, 콩, 소 등이었다.

1937년 작성된 『음성읍지』에 따르면 1930년대의 장시 규모는 장날마다 거래 금액이 4,615원 정도였다. 주요 매매 물품은 쌀·보리·콩·어물·소 등이었으며, 괴산에서 생산된 도기와 옹기들도 매매되었다. 음성읍내장은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들의 집산지인 중간 장시로, 원격지 교역의 중심지 수준의 장시는 되지 못하였으나 괴산장과 충주장의 배후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무극장

무극장은 옛 충주목의 금목면 소재지인 무극(무기)에서 열렸던 장시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무극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에도 장시가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770년대 이후에도 변화 없이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5·10일에 열렸던 무극장의 장시권은 음성장·용안역·왕장장·덕정장·정천장·진천장 등이었다. 무극장 전날인 4·9일에 보천장·장호원장·덕정장이 열렸는데, 이곳에서 장사를 한 상인들이 무극장으로 이동하고, 다음날 용안역과 한천장으로 이동하였다. 무극장을 보러 오던 사람들은 무극면 주변의 삼성면·생극면 일부 주민이었다.

『한국충청북도일반』에서 보면 무극장의 점상은 3개 소, 주막이 10개 소, 노점상 및 보부상이 16명이었으며, 장날 모이는 인구 수는 8백 명 정도였고, 장날 거래 금액은 5백 원 정도였다. 주요 매매 물품은 쌀·보리·콩·소 등이었다. 『음성읍지』에 따르면 1930년대 당시 장날 거래 금액은 3,825원 정도였고, 연중 거래 금액은 275,451원 정도였다. 주거래 물품은 쌀, 콩, 어물, 소 등이었다.

3. 한천장

한천장은 옛 충주목의 소파면 소재지인 한천에 섰던 장시이다. 『동국문헌비고』에 한천장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우목장(牛目場)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770년대에는 우목에서 장시가 열린 듯하다. 그 후 『임원경제지』에는 우목장 대신 한천장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1830년대에 한천으로 자리를 옮긴 듯하다.

그러나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에는 한천장이 폐지되었다고 표기되어 있으나 1909년에 출간한 『한국충청북도일반』 장시권도(場市圈圖)와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1:50,000 지형도에 한천장이 다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900년대에 우목에서 한천으로 옮겨 장시가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한천장은 꾸준히 지속되다가 1960년대 들어 음성읍내장으로 흡수되면서 폐지되었다.

1·6일에 열렸던 한천장의 서북쪽 20리 지점에는 음성읍내장이 있었으며, 동남쪽 20여 리 지점에는 목도장이 있었다. 한천장음성읍내장보다는 목도장권에 해당되었다고 보는데, 목도는 남한강 상류에 있어 예부터 소금 교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목도에서 한천까지 배가 운행되었으므로 한천장은 수운(水運)과 연결되었던 장시로 볼 수 있다. 1930년대 한천장의 장날 거래 금액은 970원이었으며, 연중 거래 금액은 7만 원 정도였다.

4. 보천장

보천장은 주막촌인 보천점(甫川店)이 번성하여 큰 가촌(街村)이 형성되었던 곳인 원남면 보천리에 섰던 장시였다. 조선 후기 문헌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소규모 물물 교환 형태의 장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20년대 충북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생긴 보천역으로 인하여 1920년대 후반부터 장시가 크게 열린 것으로 보인다. 보천장의 개시일은 4·9일이었다.

보천장에는 행상들이 주변 마을을 순회하며 사들인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는데, 괴산장 다음날에 열리므로 괴산장과 음성읍내장의 일부 상인이 이동하여 장사를 하였다. 1930년대 보천장의 장날 거래 금액은 760원이었으며, 연중 거래 금액은 54,492원 정도였다. 1960년대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교통과 운수의 발달로 음성읍내장으로 흡수되면서 쇠퇴하였다.

5. 왕장장

왕장장은 옛 충주목의 거곡면 왕장리에서 열렸던 장시이다. 이 지역은 오늘날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로 바뀌었다. 『동국문헌비고』에 왕장장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1770년대 이후에 장시가 열린 듯하다.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에는 거곡면에 장호원장이 있었으나 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800년대 초에 거곡면 지역에서 장시가 개설되었다가 장호원으로 이설된 뒤인 1870년대에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왕장장은 1900년대에 들어 3일과 8일에 장이 섰으나, 오늘날은 장호원장의 개시일에 맞춰 4·9일로 변동되었다. 이웃의 장호원장보다 작은 규모였으나 우시장은 장호원장보다 크게 열렸다. 『음성읍지』에 의하면 1937년에 작성된 연중 거래 금액은 26,011원 정도로, 당시 음성읍내장의 1/15, 무극장의 1/10 정도에 불과하였다.

6. 덕정장

덕정장은 옛 충주목의 지내면 덕정리에서 열렸던 장시이다. 이곳은 오늘날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로 바뀌었는데, 장시가 열렸던 지명이 모래내여서 모래내장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후기의 문헌이나 지도에 덕정장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30년대 초에 장시가 열린 것으로 추정된다.

덕정장에 관한 기록은 1937년에 작성된 『음성읍지』에 개시일과 시장 규모만 나타나 있다. 4일과 9일에 열렸던 덕정장의 1930년대 연중 거래 금액은 185,038원 정도로, 한천장이나 왕장장, 보천장보다는 훨씬 크고, 무극장보다는 작았을 것으로 본다. 현재 덕정장은 삼성장이라 하여 1일과 6일에 장이 선다.

7. 정천장

정천장은 옛 충주목의 맹동면 소재지인 쌍정리에서 열렸던 장시이다. 장시가 열리던 곳의 지명이 정천이라 정천장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헌이나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1930년대 초에 장시가 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천장에 관한 기록은 1937년에 작성된 『음성읍지』에 개시일과 시장 규모만 나타나 있다. 정천장의 개시일은 3일과 8일이었으며, 연중 거래 금액이 27,097원인 것으로 보아 왕장장과 함께 작은 규모의 장시였던 것 같다. 정천장은 1960년대에 무극장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지금도 열리는 음성 지역 오일장들]

1. 음성장

음성읍내장이라고도 불리는 음성장은 2일과 7일에 열린다. 음성 지역에서 열리는 재래 시장 중에서 가장 크게 서는 오일장이다. 음성장을 이용하는 고객은 읍내리소이면, 원남면 주민들이다. 음성장에서 주로 거래되는 물품은 음성 청결고추를 비롯한 과일과 채소류 등이며, 특히 고추가 나오는 여름부터는 음성 청결고추 직거래장터가 열려 대도시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음성장에서는 전국품바축제를 알리고 즐기기 위한 품바공연과 풍물·국악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장이 서는 난전에서는 부침개와 순대, 찐빵 등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어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전통 오일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2. 무극장

금왕장이라고도 불리는 무극장은 5일과 10일에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일원에서 열린다. 무극장을 이용하는 고객은 금왕읍생극면, 맹동면 지역의 주민들이다. 무극장에서는 음성 청결고추를 비롯하여 농특산물이 주로 거래되고 있으며, 외지 상인이 공산품 등을 많이 팔고 있다.

무극장 역시 음성장과 마찬가지로 고추가 나오는 여름부터 음성 청결고추 직거래장터가 열려 대도시 소비자가 많이 찾는다. 금왕 지역에 크고 작은 회사나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재래 시장인 전통 오일장이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무극장은 커지는 추세이다.

3. 대소장

대소장은 3일과 8일에 음성군 대소면 소재지인 오산리 일원에서 열리는 장시로 오미장이라고도 부른다. 대소장을 이용하는 고객은 대소면금왕읍, 맹동면 일부 지역 주민들이다. 음성 청결고추를 비롯하여 지역 주민들이 생산한 과일과 채소류가 주로 거래되며, 외지 상인들이 공산품 등을 많이 팔고 있다.

4. 삼성장

삼성장은 1일과 6일에 음성군 삼성면의 소재지인 덕정리 일원에서 열리는 장시로 모래내장이라고도 한다. 삼성장을 이용하는 고객은 삼성면금왕읍, 생극면 일부 지역 주민들이다.

5. 감곡장

감곡장은 4일과 9일에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일원에서 열리는 장시로 왕장장이라고도 한다. 감곡장을 이용하는 고객은 감곡면생극면, 장호원 지역의 주민들이다. 감곡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지역의 농특산물인 복숭아를 비롯한 농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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