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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322
영어의미역 Kkotdongne ("Flower Village"), the Korea's largest social welfare institution committed to humanity and love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연화준

[개설]

국내 사회 복지 시설 중 음성 꽃동네는 가장 방대한 시설·규모와 자원 봉사자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음성 꽃동네는 사랑이 이룬 기적이다. 그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현재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소중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을 만큼 버림받은 이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여 요람부터 무덤까지 침식과 요양 등 각종 편의 시설과 장례까지의 모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 사회 복지 시설인 것이다.

[꽃동네 기적의 시작]

꽃동네의 작은 시작은 오웅진 신부와 최귀동 할아버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1976년 5월 3일 오웅진 신부는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같은 해 8월 20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어느 날 오웅진 신부는 동네 사람들에 의해 다리 밑에서 쫓겨나 용담산 밑에 움막을 치고 생활하던 걸인들을 보게 되었다.

움막 안에는 얻어먹을 힘조차 없이 죽어가는 걸인들이 5가구 18명이 살고 있었는데, 최귀동 할아버지가 빌어온 음식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최귀동 할아버지의 그 헌신적인 베풂을 통해 오웅진 신부는 ‘얻어먹을 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다.

다음날 오웅진 신부는 주머니 돈 1,300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 한 포대를 사서 손수 벽돌을 찍고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1979년 11월 15일 방 다섯 칸, 부엌 다섯 칸 규모의 ‘사랑의 집’을 지어 최귀동 할아버지와 동료 걸인들을 입주시켰다. 이것이 꽃동네의 시작이다.

[확대되어 가는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집’을 시작으로 오웅진 신부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이’ 길가나 다리 밑에서 추위와 배고픔,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아 줄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오웅진 신부의 계획은 점차 교구장 주교와 동료 사제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1980년 9월 청주교구 사제총회는 꽃동네 설립을 의결하였다.

1981년 부활 대축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꽃동네 회원 모집에 나섰고, 같은 해 예수성심시녀회 소속의 김인기[아셀라] 수녀가 파견되었다. 1982년 5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산1의 45번지 9,807평을 매입하였으며, 곧이어 익명의 독지가로부터 산 2만 평을 기증받았다. 그 후 꽃동네 본동(현 명칭 ‘사랑의 집’) 370평을 준공하여 모두 5개 동 건물에 270명이 입주하였다.

1983년 청주교구 사제총회에서 신순근(申順根)[비오] 신부와 장봉훈(張奉勳)[가브리엘, 현 천주교 청주교구 교구장 주교] 신부가 이사로 임명되었다. 1984년 3월에 사회 복지 시설로 인가를 받았으며, 11월에 서울사무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10월에는 정신요양원(1,100평)과 결핵요양원(930평)을 준공하였고, 1986년 12월 27일 꽃동네에 자원하여 모인 봉사자들의 공동체가 청주교구장 정진석(鄭鎭奭)[니콜라오] 주교로부터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예수의 꽃동네 자매회’라는 명칭으로 정식 수도회 창설을 인가받았다.

1987년 1월에는 오웅진 신부가 그 동안 겸임해 온 금왕본당을 떠나 꽃동네 지도 신부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노인요양원(1,200평)을 준공하였고, 1988년 10월에는 알코올중독자요양원(1,200평)과 인곡자애병원(800평)을 준공하여 1989년 4월 개원하였다. 1989년 7월에는 수도권 지역의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34-14번지 15,200평 부지에 제2의 꽃동네(가평 꽃동네)를 설립하여 수녀 1명을 파견하였다. 이어 1990년 5월 음성에 1,000평의 심신장애자요양원을 준공하였다.

1992년 9월에는 가평에 부랑인 시설(1,916평)을 준공하였으며, 1993년에는 같은 곳에 정신요양원(2,200평)과 노인요양원(2,100평)을 준공하였다. 1994년 5월에는 음성에 성 빈첸시오 천사의 집(800평)을 준공하였고, 같은 해 가평에서는 심신장애인 요양원(2,000평)과 노체리안드리자애병원(2,000평)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996년 3월에 개원하였다.

1996년에는 필리핀에 수도회 진출을 시작으로 세상 곳곳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온 국민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불행한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려는 예방 복지의 취지에서 ‘사랑의 연수원’을 개원하여 매년 300,000명이 사랑과 행복의 가치를 새롭게 배우고 돌아가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1995년 11월에는 꽃동네 천사의 집이 국내 입양기관으로 허가되어, 어린이들에게는 가정의 품을, 가정에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1999년에는 꽃동네 설립 정신에 입각하여, 사랑과 열정만으로 채워줄 수 없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 뿐 아니라 영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4년제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를 개교하여, 사회복지 특성화 대학으로서 사회에 요긴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6년부터 간호학과를 개설하여 사회복지와 긴밀히 연결된 영역의 전문 교육을 활성화하고 있으며, 대학원 과정도 개설되어 다수의 석사 학위 소지자를 배출하고 있다.

1999년 5월 12일 미국 꽃동네를 개원하여 남미 등 가난한 나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고 가난의 영성과 사랑을 뿌리내리는 데 최선을 기울이고 있다. 이어 2000년 11월에는 꽃동네 아이들 가운데 중증 장애아들을 위한 꽃동네학교(특수학교) 설립을 인가받아 2001년 개원하여 헌신적인 교사들을 통한 양질의 교육과 가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생활 능력과 학습능력의 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2001년 8월에는 신축 정신요양원을 준공, 정신장애 가족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하게 되었으며, 아동 시설도 준공하였다. 2002년에는 미국의 뉴저지 꽃동네와 테메큘라 꽃동네 축복식을, 2005년 10월에는 조지아 꽃동네 축복식을 각각 가졌다. 2002년 11월에는 청주 꽃동네회관 개관을 통해 지역사회에 사랑과 봉사, 기부 문화를 알리는데 단초를 마련하였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사랑을 전개해 온 꽃동네는 2006년 4월 26일 (재)청주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재)예수의 꽃동네 유지재단으로의 분리를 허가받고, 5월에 등기를 마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2006년 7월에는 꽃동네 가족 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돌아가신 행려 사망인을 위한 납골묘 조성을 시작하였다. 9월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꽃동네의 영성을 연구·심화시켜 가르쳐주고 체험시켜줄 꽃동네 사랑의 영성원 성부의 집을 준공하였으며, 11월에는 노인전문요양원을 준공하였다.

또한 해외 진출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설립 30주년을 기념하여 2006년 ‘제1회 세계 젊은이 성령대회’를 개최하여 전 세계 24개 국의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세계 복음화의 장을 열었고, 31주년을 맞은 2007년에는 우간다로의 진출을 포함하여 “꽃동네는 세계로, 세계는 꽃동네로”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세계 극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전할 소명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꽃동네 시설]

1. 부랑인 시설

1) 사랑의 집: ‘본동’이라 부르다가 꽃동네의 기원이 된 ‘사랑의 집’의 이름을 따서 현재는 ’사랑의 집’이라 부른다. 꽃동네 회원들의 후원금 383만 원을 기초로 하여 지어졌고 음성 꽃동네 시설 중 맨 먼저 생긴 시설이다. 대부분 한 가지 이상 질병과 장애를 가진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 살고 있다.

2) 신 평화의 집: 연고지 없는 정신 지체나 알콜중독자 환자들 중에 조금 활동할 수 있는 환자가 90명이 있다. 농사철에는 농사도 거들곤 한다.

3) 구 평화의 집: 부랑인 시설로 비교적 정상적인 분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40여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4) 소망의 집: 부랑인 시설로 결핵을 앓았던 이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으로 지금은 결핵 환자들은 거의 없고 40여 명이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5) 요한의 집: 홍승옥이 15년간 동냥하여 모은 100만 원을 불쌍한 사람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하였고 그 돈으로 지은 부랑인 시설로 남자 알코올 중독자 13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6) 애덕의 집: 꽃동네 돕기 바자회 이익금 3,000만 원이 기초가 되어 지어졌으며 오갈 데 없는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

2. 심신장애인 요양원

1) 희망의 집: 익명의 부부가 33년간 휴지를 주워 모은 983만 원을 기증하였고 이 돈이 기초가 되어 마련된 곳으로 남녀 심신장애인들이 살고 있다. 한글 교실, 미술방, 서예방, 컴퓨터 교실, 공예방 등을 운영하며, 상설 작품 전시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2) 환희의 집: 오갈 데 없는 남·여 정신장애인 520여 명이 살고 있는 요양원이다. 지하 2층, 지상 6층 건물로 종이접기, 공예 등의 각종 프로그램과 도예실, 영화관, 디스코장, 카페도 마련되어 있다.

3) 요셉의 집: 신체 건강한 5~6명의 아이들과 엄마(이모)가 한 가정을 이루며 일반 가정처럼 생활하고 있다. 수녀와 교사가 아이들을 지도하고 중학교 이상 남자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다.

[꽃동네 헌장]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그 고귀한 은총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구원이 동일한 실재로서 사랑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구현되는 특별한 은총임을 믿으며, 오늘도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몸소 살고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우리 꽃동네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한 명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주춧돌을 두고, 오웅진 신부와 최귀동 할아버지의 만남, 특히 가톨릭 신앙에 몸을 바친 오웅진 신부의 특별한 ‘하느님 체험’을 우리의 머릿돌로 삼는다.

우리 꽃동네는 가난과 고통으로 소외된 이들과 보잘것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로서 그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사랑을 체험하는 사랑의 구도자이다. 우리 꽃동네는 사랑이란 은총의 기꺼운 도구가 되기 위하여 특히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여정을 함께 사는 항구한 사랑의 동반자다.

우리 꽃동네는 사랑의 결핍으로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여 돌봄으로써 그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의 삶을 함께 살아 하느님의 가족이 되도록 돕는 사랑의 중개자다.

우리 꽃동네는 사랑의 결핍을 불러오는 원인을 예방하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참 사랑을 가르치고 체험시키는 산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개인과 가정, 국가와 인류 사회에 참 행복을 선포하는 사랑의 교육자다.

우리 꽃동네는 그 이념을 따라 진정한 사회 복지 사업을 계발하고 실천할 봉사자와 전문 인재를 키우며,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고, 가꾸며, 거두어들이는 일꾼이 되게 하는 사랑의 전문가다.

마침내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이신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이신 하느님께 돌아감으로써 인류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참되고 영원한 사랑의 특별한 현실’로 남고자 한다.

[작은 예수, 최귀동 할아버지]

최귀동 할아버지는 꽃동네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인물이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무극의 부잣집 귀한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귀동이라 불리웠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심한 고문 끝에 정신병을 얻었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들은 아편 중독으로 돌아가시고 가정은 파산되어 갈 곳이 없자 무극다리 밑에 거처를 정하고 살게 되었다.

그 다리 밑에서 최귀동 할아버지는 오갈 데 없이 죽어가는 걸인들을 위하여 40여 년간 구걸한 음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는 등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그 봉사가 오웅진 신부로 하여금 꽃동네를 설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숭고한 사랑의 실천으로 1986년 2월 15일 ‘작은 예수’라는 칭호를 들으며 ‘한국가톨릭대상 ’사랑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고 부상으로 120만 원을 받았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부상으로 받은 상금 120만 원을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 집 지어주라’는 말과 함께 내놓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2억 원이 소요된 노인요양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1987년 10월 15일 최귀동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인 노인요양원(1,200평)이 준공식을 가졌다. 1988년 5월 노인요양원이 개원되자 최귀동 할아버지는 노인요양원에서 생활하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최귀동 할아버지는 1990년 1월 4일 오후 1시 15분 평소 지병인 혈압이 재발하여 인곡자애병원에서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어."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타계하였다. 눈 못 보는 형제를 위해 안구를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겨 27세 청년이 눈을 뜨게 되었다.

장례식은 1월 8일 오후 2시 3,000여 명의 꽃동네 회원과 꽃동네 가족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치루어졌다. 김옥숙 영부인, 국무위원, 충남·북도지사, 음성군수 등 각계에서 보낸 조화 속에 묻혀 명복을 비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고 새겨진 바위 밑에 안장되었다. 1991년 1주기에는 최귀동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만들고 회원들이 보낸 부의금으로 2.5m 높이의 동상을 만들어 제막식을 가졌다.

[참고문헌]
  • 『음성군지』 (음성군지편찬위원회, 1996)
  • 음성군청(http://www.es21.net)
  • 꽃동네(http://www.kko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