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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320
한자 陰城儒敎文化-産室-鄕校-書院
영어의미역 Confucian heritage in Eumseong, sanctuaries for great teachings by great philosophers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기범

[개설]

수천 년 동안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온 유교는 인(仁)으로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며 정치학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치면서 조선왕조로 들어와 국가 지배 이념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볼 때는 종교의 범주에 넣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초월적 믿음의 대상이나 내세관, 종교적 의식이나 교단조직 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능이나 역할 등이 종교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음성 지역에서 유교의 정신과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교문화유적으로는 교육기관인 음성향교와 서원, 선현을 제향하는 사우 등을 들 수 있다.

[음성향교-유교문화의 확산처 역할을 담당하다]

향교(鄕校)의 기원은 고구려의 경당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향교와 같은 향교가 설립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이다. 그뒤부터 향교는 지방 군현에 확대 설립되었으나, 무인집권기와 몽고의 침입, 왜구의 환란 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공민왕 대 이후부터 재건되어 그 수가 차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향교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설립·운영되는 교육기관으로서 전국적으로 확산,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는 향교를 유교의 보급과 유교적 교양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기구로 인식하고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향교는 지방 교화와 교육기능의 체제를 갖추면서 전국 팔도의 부·목·군·현에 설립되었고, 지방관아와 함께 지방의 공기관을 대표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향교의 주요 기능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성현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종교 기능, 둘째 지방에 설립된 유일한 관학교육기관으로의 교육적 기능, 셋째 성현을 본받도록 하는 사회적 교육기관이자 미풍양속을 장려하고 도덕생활을 진작시키는 지방교화기관으로서의 사회교화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선현의 배향과 학생의 강학을 기능으로 하는 만큼 향교 건물에서 핵심적인 공간은 대성전과 명륜당이었다.

원래 향교의 학생 정원은 15명으로, 15명 이상인 경우 나머지는 군역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학생들의 불평이 커지자 결국 1471년(성종 2) 정원을 확충하여 30명으로 만들었는데, 16세 미만의 학생은 군역과는 관계가 없었으므로 정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듯 학생의 정원이 문제시된 건 군역 자원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학생의 나이를 40세 미만으로 규정하였으나 차츰 엄격해져서 15~20세로 정해졌다.

향교의 학생들은 교과서로 사서(『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와 오경(『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 그리고 『소학(小學)』·『효경(孝經)』·『성리대전(性理大全)』·『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초등 교과서를 비롯하여 『근사록(近思錄)』과 『가례(家禮)』와 같은 유학과 예법의 기본 서적도 배웠다. 뿐만 아니라 『통감(通鑑)』을 비롯한 역사책과 『문선(文選)』·『고문진보(古文眞寶)』·『한유당시문(韓柳唐詩文)』·『초사(楚辭)』 등 문학과 관련한 서적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향교에서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이 동시에 강조되었으나, 주로 강경이 기초가 되었다. 경전의 강독은 매일 실시되어 일강(日講)이라 했으며, 출석과 강독 능력이 평가되었다. 제술은 현감에 의하여 한 달의 보름 전[望前]과 보름 후[望後]의 두 번에 걸쳐서 월과(月課)라는 평가를 하여, 한 달에 한 번 월말에 도백(道伯, 관찰사)에게 보고해 우등생에게 호역(戶役, 잡된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권장 사항이 행하여졌다. 또 매년 6월에는 도회(都會)라고 하여 도에서 시행하는 시험이 있어서, 여기에서 우등생이 되면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기도 하였다.

향교의 교육은 국가에서 파견된 훈도가 맡았다. 처음에는 지방에서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을 뽑아 학장이라 했으나 이에 대한 보수가 없어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17세기 이후에는 국가에서 향교의 교관을 파견하지 않게 되고, 향교는 청금록(靑衿綠)에 입안된 유생 대표가 훈장이 됨에 따라 본래의 강학 기능보다는 교화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향교에는 노비도 지급되었는데, 음성향교에는 규정에 따라 열 명이 배정되었으나 도망이나 속량 등으로 인해 17세기에 이르면 노 4명과 비 3명만이 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1년 12월 17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된 음성향교는 본래 옛날 음성현의 동쪽 1리인 지금의 음성읍 석인리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음성향교는 현재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성현들에 대한 제향의 기능만을 담당하여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음성의 서원-유림의 전당으로 우뚝 서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기관(私學機關)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향교의 교육 기능이 점차 약화되면서 향교를 대신하여 서원과 서재가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존재하던 서재(書齋)와 맥이 닿아 있으나, 서재가 단순히 유자(儒者)의 안거강학(安居講學)의 장소였다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제향하는 사묘(祀廟)를 갖추고 있다는 특징을 가졌다.

서원은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공부를 하는 곳이다. 그 연원이 사설교육기관인 서재에서 비롯된 것도 그렇지만,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것 역시 그들의 큰 뜻을 배우고 따르고자 함에 있었다고 할 때, 서원 설립의 기본 의도는 배움의 장을 마련하는 데 있었다고 봐야 한다. 서원의 설립은 대체로 후손과 문인(門人)을 포함한 사림들의 주관하에 이루어졌으며, 본읍(本邑)이나 인근 지방관이 서원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서원은 향촌사회의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서원이 일차적으로 배움의 장이라는 사실과 매우 연관이 깊다. 배움에 있어서 필수 조건은 서적이다. 따라서 교육과 연구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구비하고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 서원에 문고(文庫)를 두어 여러 가지 서적을 수집, 보관하고, 나아가 연구 성과 또는 선현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하여 서적을 출판하는 것은 서원의 본래 기능이라고도 하겠다

서원의 교육은 자체적으로 제정한 원규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원규에는 서원의 입학 자격과 원임(院任)의 선출 절차, 교육 목표 및 벌칙 조항이 수록되어 있다. 서원교육은 원장(院長)·강장(講長)·훈장(訓長)들의 원임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서원의 교육 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서원건축의 구성과 배치는 문묘와 향교와 유사하여 앞쪽에 교육시설을, 머리쪽에 제향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건축양식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며 특별한 꾸밈도 없고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리는 조형미가 돋보이며 건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서원에서 사당(祠堂)은 선현의 위패나 영정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배향 인물은 보통 1인을 주향으로 시작하나 뒤에 다시 존중할 인물이 생기면 추가로 배향하였다.

서원의 강당(講堂)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토론하는 곳이다. 서원 안에서 제일 규모가 크며,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적절히 매치되어 있다. 건물 중앙의 치마 밑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서원에서 재실은 원생들이 잠자는 곳으로, 보통 강당 앞에 대칭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과 함께 교육 공간의 핵심을 이룬다. 장판고는 서책이나 책을 찍어 낸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며, 제기고는 전사청이라고도 하는데 제향 때에 필요한 제수를 마련하고 기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또한 원생들이 교육 중에 휴식하거나 여가를 위해 마련한 건물로 누각이 있다.

음성 지역에서도 조선 후기에 들어와 향교의 교육 기능이 점차 약화되자 향교를 대신하여 서원과 서재가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원을 통해 음성 지역의 양반가 자제들은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에도 급제하고 지역 인재로도 성장하게 되었다. 음성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과 서재는 운곡서원(雲谷書院)지천서원(知川書院), 옥산사(玉山祠), 백련서재(白蓮書齋), 태교사(泰喬祠) 등이다.

음성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꼽히는 운곡서원삼성면 용성리 서원말 북쪽산 능선이 끝나는 지점의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602년(선조 35) 정구(鄭逑)가 기존의 백운서당(白雲書堂)에 주희, 곧 주자(朱子)를 모시고 백운서원이라 이름하였으며, 그후 정구가 죽은 뒤인 1661년(현종 2) 정구를 배향하며 운곡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액은 1676년(숙종 2)에 받았는데, 이때 주자의 영정과 화상찬(畵像讚)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892년(고종 29) 지방 유림의 발의로 단을 만들어 제향을 지내고 1894년 서원을 재건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 주희의 옛 영정을 가져와 봉안하였다. 운곡서원은 비록 규모는 작으나 간결하고 소박하게 처리한 건축양식에서 서원건축의 한 특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운곡서원과 함께 음성 지역 유림들의 대표적 전당인 지천서원생극면 팔성리 생극평야를 바라보며 부마팔현지(扶馬八賢址)라 지칭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김세필(金世弼)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팔성산 아래 경치 좋은 이곳에 초옥을 짓고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는데, 이것이 지천서원의 시초이다. 1740년(영조 10)에 창건하였다가 철폐되었고, 1800년(정조 24)에 중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2차 폐원되었다. 1898년 공자당(工字堂)을 중건하고 1906년 재건한 뒤 1963년 중수를 하였다. 지천서원이 문을 열 당시에는 김자수김세필, 김저(金儲)[1512~1547], 김의[1572~1649], 김정현[1591~1675], 김홍욱(金弘郁) 등 6위의 위패를 모셨으나, 이후 김종현과 박상[1474~1530]을 추가 배향하고 있다.

감곡면 문촌리 오갑에 위치한 옥산사는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 이기홍(李其洪)을 모시고 춘추로 제행을 받드는 사당이다.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에 있던 문산서원(文山書院)이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자, 40여 년 뒤인 1909년 사액서원이 철폐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 유림과 후손들이 복원을 결의하여, 후손의 세거지인 오갑에 1909년에 재건한 것이다. 그후 1927년에 중수하였으며, 1983년 전주이씨 봉산군파 종친회에서 중건하였다.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는 백련서재(白蓮書齋)는 조선 후기 숙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신후재(申厚載)[1636~1699]가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유배형을 받은 후 1697년에 석방되어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했던 곳이다. 서재 앞에는 연못이 있고, 못에는 백련꽃이 있는데, 이는 신후재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가지고 온 백련근(白蓮根)을 심은 것으로, 백련서재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있는 태교사는 1744년(영조 20) 주응동이 조선 초기의 문신 김여지(金汝知)[1370~1425]가 명에서 가져온 주자의 영정을 경기도 안성에 사는 김용으로부터 기증받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문곡영당(文谷影堂)이 그 시초이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재건되었는데, 이때 사당의 명칭을 태교사로 고쳐 불렀다.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올렸으나 근래에는 주자의 생일인 음력 9월 15일에만 향사를 올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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