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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314
한자 陰城-山城-古代-戰略要衝地
영어의미역 Mountain fortress of Eumseong maintaining the tradition of defending the homeland from enemy attack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집필자 차용걸

[개설]

음성 지역에 언제 처음 성곽이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청동기시대 구릉 위에 만든 마을의 둘레에 환호(環壕)를 두른 유적이 나타나고, 이어서 그 안팎으로 나무말뚝 따위를 죽 이어서 박아 만든 울타리, 곧 울짱의 형태와 같은 목책(木柵)을 두른 시설이 나타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목책 이외에 흙으로 다져서 성벽을 만드는 단계로 발전된 것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거대한 규모의 성곽을 축조한 기록과 함께 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백제의 왕경(王京)으로 축조된 서울의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 등이다.

한강 하류에서 성장한 백제가 세력권을 확대하며 소백산맥 남쪽의 신라와 교섭할 때쯤, 한강 상류에 위치한 음성 일대에서는 토착 세력이 스스로 작은 규모이지만 토성을 축조하였거나, 백제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하나의 지방 단위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의 외곽 지역으로 편입된 4세기경까지는 보다 견고하게 산 위에 돌로 성곽을 축조하여 신라의 세력이 북상하는 것을 저지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음성 지역이 고구려나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은 대략 5세기 후반 이후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이다. 그리고 신라가 음성 일대를 점령한 6세기 중엽 이후 계속 신라의 영역으로 머물다가 고려와 조선으로 넘어간다.

[기록으로 보는 음성의 성곽]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 보면, 음성의 옛 이름은 잉홀(仍忽)이었으나 통일신라로 들어오며 음성(陰城)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음성의 옛이름인 잉홀에서 홀(忽)이란 고구려 말로 성읍(城邑)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 고구려의 처음 도읍지를 홀본(忽本)이라고 한다든지, 백제가 처음 건국할 때 온조(溫祚)의 형인 비류(沸流)가 미추홀(味鄒忽)에서 건국했다고 하는 등으로 미루어 홀(忽)이라는 말이 성읍(城邑)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성의 첫 이름이 잉홀로 불린 것은 고구려·백제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성을 가진 고을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의 기록물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음성현과 관련하여, “진산(鎭山)이 가섭산(迦葉山)이고, 고적으로 옛 산성이 수정산(水精山) 위에 남아 있는데, 돌로 쌓아 둘레가 1,271자, 높이가 1장(丈) 남짓하며, 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으나 당시는 이미 경영이 폐지되었던 산성”이라 하고, “그 남쪽에 옛 고을 터가 있어서 관평(官坪)이라 불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는 수정산성 아래 남쪽으로 고을이 있었고, 수정산성은 유사시에 들어가서 지키는 산성이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지금의 음성군 삼성면과 경기도 안성시·이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북쪽 망이산 위의 산성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주목에 소속된 망이성(望夷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망이산은 충주에서 서쪽으로 91리에 있다고 하고, 망이성 봉수(望夷城 烽燧)라 하여 성이 있는 곳을 언급하였다. 『호서승람(湖西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 역시 망이성 봉수(望伊城 烽燧)를 언급하고 있으며, 『조선환여승람』에는 “음성의 서쪽 50리의 산을 마이산(馬耳山)이라 하는데, 그 위에 봉대(烽臺)가 있다”고 하여 산의 이름과 성 이름이 계속 다른 표현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음성군의 산성으로 열 군데가 기록되어 있다. 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의 성격과 유사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으로 크게 구분하는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는 음성의 성들을 대부분 산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음성 지역에서 조사·발굴된 성터들은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거나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다.

[음성군에 있는 성곽들]

1. 수정산성

1999년 충청북도 기념물 111호로 지정된 수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동쪽을 향하여 계곡 상단을 에워싼 둘레 577m의 규모로, 서북 방향에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고,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그릇 조각과 이후의 기와조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는 음성 지역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남매축성 설화」와 「할애비성과 할미성」과 관련한 전설 등도 남아 있어 군민들이 휴식차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일부 발굴 조사 내용을 토대로 성벽의 복원 정비가 이루어지고, 서문 터를 비롯하여 중요한 부분에 대해 발굴조사가 계획되어 있다.

2. 음성 망이산성

음성 망이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內城)과 돌로 쌓은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진 산성으로, 성 안에는 봉수대가 있다. 경기도와 경계를 이룬 해발 472m의 산봉우리와 북향한 계곡을 둘러싼 석축 둘레 약 2㎞의 외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축조되고, 둘레 250m의 토성은 4세기경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경기도에 속한 부분은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대사리에 속한 부분은 2003년도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토축인 내성은 백제가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축조하여 음성과 진천 지역으로 진출한 교두보로 사용한 것이라 여겨진다. 외성은 고려 전기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것으로, 인근 지역 주민이 들어가서 지킬 수 있도록 규모가 크다. 최근까지 내성의 일부와 외성의 문터 및 치성, 건물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사방의 문과 여러 곳의 치성(雉城), 음성 쪽 남향 계곡의 수구(水口)가 밝혀졌다.

1998년의 서문 터 지역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때에 외성이 축조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고, 성에서 나오는 유물 가운데 고려 초기인 963년(광종 14)에 만든 준풍사년(峻豊四年)이라 찍힌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이웃한 봉업사(奉業寺) 등과 연계된 성터라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2001년 12월에 성 안에서 6세기경의 쇠로 만든 단갑(短甲)이 출토되어 대략 서기 551년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던 시기에 신라의 점유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음성 망이산성은 서쪽으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죽주산성(竹州山城)과 함께 북쪽에서 내려오는 세력을 막아낼 수 있는 규모와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치성(雉城)의 구조를 보면, 앞쪽을 마구리 양단의 곡면으로 쌓으면서 아래에서 위로 단(段)을 이루도록 그렝이 턱을 두어 사수(斜收)하는 벽을 이루게 한 점은 고구려의 산성에서 흔히 보는 양식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2007년도 조사에서는 네모꼴의 치성 구조가 신라 후기나 고려 전기에 성벽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만든 것과, 성벽을 먼저 쌓고 나중에 치성을 붙여 만든 두 종류가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또 남쪽 계곡에서는 처음 만든 남북 335㎝·동서 500㎝ 규모의 작은 저수지가 축조된 후에 남북 565㎝·동서 735m의 규모로 확대된 저수지가 겹쳐진 상태로 나타나고, 배수로를 설치하여 넘치는 물을 성 밖으로 내보낸 것이 확인되었다. 이 저수지의 동편 낮은 곳에 성벽 중간을 통과하는 수구(水口)가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부분의 성벽은 매우 치밀하게 축조되어, 물이 성 밖으로 나와 떨어지는 곳에는 보완 석축이 계단식으로 축조되었다. 저수지 안에서는 길이 45㎝, 너비 39㎝, 두께 5㎝에 달하는 매우 큰 기와뿐만 아니라, 백제 한성 시기의 그릇조각이 매우 많이 발견되어 내성이 단순한 역할을 한 작은 거점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경영된 것임을 알게 하였다.

3. 석인리 산성

석인리새말 뒷산에 있는 둘레 130m 정도의 석축 산성이다. 현재 남북으로 약간 긴 타원형을 이룬 석축의 산장(山檣)이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서쪽과 북쪽면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있으나 남쪽과 동쪽 면은 원형대로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을 쌓은 돌들은 주변에서 흔하게 채취할 수 있는 잡석들이며, 치석은 거의 하지 않은 상태이다. 서북으로 수정산성, 남서쪽으로 국사봉 산성과 연락이 가능하게 보루 구실을 하도록 되어 있다.

4. 신천리 토성

신천리 토성은 음성의 중심부에 있는 네모꼴 토성으로 유일하게 평지에 있다. 읍내리 역말의 남쪽에서 국도 37호선이 성터의 남쪽에서 합류하며, 점말이라 불리는 곳의 남쪽은 소여천(所餘川)의 동서로 들판을 이루어 성리뜰이라 불린다.

신천리 토성은 이곳의 유응주택을 감싼 남북으로 긴 네모꼴의 토성으로, 둘레 465m, 높이 2.4m로 있었으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었다. 당초 옛길인 돌명이(신천5리)와 찬샘들(신천3리)의 북쪽으로 동쪽의 오리정뜰을 거느린 중심부로, 해발 140m 내외의 구릉 선단부에 해당되었던 곳이므로 옛 고을이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다.

5. 사향산성

삼생리원남면 덕정리 사이의 해발 342.2m의 사향산(麝香山)에 있는데, 둘레가 약 1㎞에 달하는 석축 산성이다. 주변의 산줄기를 보면, 서북쪽의 소속리산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보현산의 산줄기가 진천군과의 경계를 형성하고, 여기서 발원한 물줄기는 금강으로 흘러드는 초평천이 된다.

사향산성은 이 초평천의 동북쪽 상류에 위치한 관계로, 교통로로는 음성에서 남서향에 있는 초천리조촌리 방면의 교통로를 공제할 수 있으며, 인근 산곡에 발달한 물줄기를 끼고 사는 사람들의 피난 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문헌 기록에 보이지 않던 산성으로, 1996년에 처음 알려졌다.

6. 갑산리 산성

소이면 갑산리정산말 북쪽 산봉우리 위에 있는 산성이다. 둘레 약 130m의 평탄지가 있는데, 그 둘레를 흙담으로 친 듯하다. 이곳은 음성천 유역의 낮은 구릉과 들판을 끼고, 서쪽으로는 덕고개를 넘어 음성에서 괴산에 이르는 길과 합류하는 곳으로, 한편으로는 충주 주덕 방면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음성천을 건너 괴산으로 통하는 직로에 위치한다.

7. 국사봉 산성

해발 410m의 국사산(國師山)이 남쪽으로 괴산과 경계를 이루는 부근에 있다. 둘레가 200m 남짓하며, 남북으로 뻗는 능선에 토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음성의 남동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서쪽으로는 오대산성과 마주 보인다. 음성평야를 휘감아 수정산성을 비롯한 산성들과 서로 연락이 가능한 위치가 된다.

8. 오대산성

음성의 정남쪽에 있는 오대산의 해발은 400m로 괴산군과 경계를 이룬다. 지금은 안쪽 둘레 약 120m, 바깥 둘레 약 200m인 삭토된 토루처럼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민보(民堡)로 축조하여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지켰다는 전설이 남은 것으로 보아 한때나마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민간 신앙과 관련된 시설물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1950년의 6·25전쟁 당시에도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9. 성본리 토성

대소면 성본리최성미 동남쪽 구릉에 있는 작은 토루이다. 성 안에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에서 전사한 어재연(魚在淵) 장군 형제의 재실인 쌍충재가 있고, 그 뒤에 묘소가 있다.

10. 이진봉 산성

이진봉 산성고진봉(古陣峯) 산성으로도 불리는데, 고진봉이란 우리말로 옛 진을 쳤던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북쪽으로 흘러 청미천과 합류하는 웅천의 동쪽으로 칠성산과 용바위산이 솟아 있는데, 그 북쪽으로 해발 231m의 이진봉이 솟아 있다. 북쪽은 생극면, 남쪽은 무극리금왕읍이고, 동남쪽으로 음성과 충주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서쪽의 웅천 건너로는 장자봉 산성이 마주 보이며, 경기도와의 경계에 위치한 팔성산성과 우등산성이 건너다보인다. 지금은 산이 많이 훼손되어 흔적이 매우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의 기와조각과 그릇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지역 주민들이 쌓았다고 전해 오는 성이다. 당초 규모는 둘레가 360m로, 사람 키만큼의 높이로 남아 있는 성벽이 뚜렷하였다고 한다.

11. 장자봉 산성

장자봉 산성생극면 병암리의 만담리 뒷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섬말이라 불리기도 하는 만담리 뒷산은 해발 190m 내지 170m 정도의 봉우리가 남북으로 길게 웅천 변에 솟아 있다. 넓은 들판에 섬처럼 솟은 봉우리의 북쪽 끝은 동쪽의 이진봉과 함께 웅천을 좌우에서 바라보면서 그 사잇길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장자봉 산성은 전해 오는 문헌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2002년 처음으로 성의 존재가 확실하게 밝혀진 토축 산성이다.

전체 둘레가 1㎞에 달하는 규모로, 능선 위의 둘레는 약 500m이다. 남쪽 끝의 민묘가 있는 부분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그릇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이곳에 살던 장자(長者), 즉 부자가 쌓은 성이라고 한다. 유물의 출토 상태로 보아 호족시대부터 존재하던 중요한 성터로 판단된다. 동쪽으로 웅천 건너 이진봉과 마주할 뿐만 아니라 서북쪽으로 우진산성과 팔성산성이 이곳을 중심으로 배치된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12. 팔성산성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리와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관성리에 경계한 해발 377.4m의 팔성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향한 계곡 상단부를 에워싼 석축 산성으로, 꽤 멀리서도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동북 방향의 들판에서 청미천과 웅천이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넓은 평야를 한눈에 바라보는 위치이며, 서쪽으로도 넓은 평지가 있다. 둘레가 600m 이상이 되고, 성 안에 우물터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그릇조각부터 역대의 사용 흔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여덟 번 싸워 여덟 번 승리한 곳이라고 팔성산성이라 불린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13. 우등산성

생극면 관성리무술 남쪽에 있는 해발 262m 우등산(禹登山)에 있는 산성이다. 전해 오는 문헌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산성으로,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산의 정상부 평탄 대지와 급한 경사면을 이용하여 성벽을 구축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북쪽으로 팔성산성을 바라다보며, 동향으로 멀리 장자봉 산성과 고진봉 산성이 바라다보인다.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산성으로 보인다. 일부 조사된 성벽을 보면, 가파른 경사를 더욱 가파르게 깎아내고 겉에 돌을 한 층 더 쌓아 올리면서 안쪽을 흙으로 다짐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의 능선 정상부에 평탄지가 마련되어 있고, 서향한 평탄지의 끝에 토루 모양으로 성벽의 통과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전체 규모는 북쪽의 능선이 낮아지는 곳에 있는 토성의 벽체를 포함하여 약 600m 정도 되는데, 정상부의 평탄지가 내성처럼 구획되어 있다. 중세에 이웃한 산성들과 더불어 음성, 음죽의 고을을 지키는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4. 가막산성

원남면 하노리 벌가마골 동쪽에 있는 해발 485m의 가막산은 산줄기가 남북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북쪽은 음성천을 건너 수정산성과 마주하고, 남쪽은 구안리 큰말에서 낮아져 동·서 통로가 된 다음 남향하여 구안리고개를 넘어 괴산군 소수면으로 이어진다. 이 교통로는 음성에서 괴산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통로이기도 하다. 가막산성오성산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할애비성으로도 불리는데, 둘레 약 1㎞의 동서 방향으로 긴 능선을 에워싸고 있다. 산에서 자연 할석을 모아 축조한 듯한 석축 산성으로, 전형적인 중세의 산성 형식을 보이고 있다.

가막산성은 음성에서 남향하거나 괴산에서 북향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인 현재의 국도 37호선지방도 49번 사이에 있어서 남북의 교통로를 공제할 수 있고, 남쪽과 북쪽의 동서 방향 통로도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에 해당된다. 북쪽의 수정산성가막산성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할미성이라 하고, 가막산성은 그보다 높은 곳에 있으면서 남북으로 마주 보므로 할애비성으로 불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성곽으로 살펴보는 음성의 향토수호 역사]

현재까지 음성 지역에서 조사된 성곽들은 모두 14개 소로 파악되었는데, 이것은 음성보다 규모가 큰 충주 지역의 10여 성들에 비해 많은 숫자이다. 물론 충주 지역의 성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충주읍성·탄금대 토성·장미산성·남산성·대림산성·보련산성·용관동 산성·견학리 토성 등 규모가 큰 성터가 많다. 성의 규모는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그 지역에 살았던 백성들의 규모를 반영하기도 한다.

충주는 과거 삼국시대 백제·고구려·신라의 중앙 권력과 군사적 힘이 곧바로 미치는 지역으로 중요시되었다. 이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서 기능했던 충주의 지리적 위치 때문으로, 이곳에서의 공방전은 곧 영토의 확대나 축소와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는 또 하나 교통의 중심부인 청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음성 지역의 경우,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성들이 음성의 중심부에서 방사성 형태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성은 낮은 위치에 있던 신천리 토성인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나타난 대표적인 읍성의 양상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읍성 형식이 출현한 것은 이른 곳은 이미 삼국시대 도성이 있었던 지역이지만, 지방 도시에서 평지의 읍성과 산성이 분리되어 존재한 것이 일반화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음성의 북동쪽에 위치한 충주 지역은 국원소경을 거쳐 중원소경이 된 곳이고, 남동쪽의 한 거점인 청주 지역은 통일신라의 서원소경이 자리했던 곳이다. 그 사이에 해당하는 음성은 당시에도 작은 고을인 현(縣)의 소재지였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17년인 716년 10월에 한산주 관내의 여러 고을에 성을 축조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당시 음성 고을에도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822년(헌덕왕 14) 3월에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는데, 이때 국원과 서원의 사신(仕臣)들과 여러 군현을 위협하여 세력 확충을 꾀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음성 지역 역시 이러한 내란에 휩싸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891년(진성왕 5) 죽주의 호족인 기훤(箕萱)에게 의탁했던 궁예(弓裔)가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의탁하고, 897년(혜공왕 1)에는 양길이 국원 등 30여 성을 차지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당시 음성 지역은 이들 호족들의 세력 아래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899년에는 왕건이 충주와 청주, 괴양(괴산) 등지를 쳐서 세력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음성 지역 역시 이 당시 전란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했을 것이다. 이처럼 치열한 삼국시대 이후의 고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대표되는 것이 수정산성팔성산성 등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외적, 즉 이민족(異民族)의 침입과 관련하여 성곽의 축조가 고대와는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가장 큰 특징은 성곽이 험준한 곳에 축조되고, 계곡 아래까지 성벽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성의 규모가 삼국시대에 비해 왜소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곧 주변의 인구가 들어갈 만큼의 규모로 산성을 짓고, 그 안에 인근의 백성이 모두 들어가 오랫동안 성문을 닫고 지키는 방어 수단으로서 성곽 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기록을 보면 거란족의 남하나 몽고족의 침입 때는 조정에서 특별히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파견하여 백성들이 무사히 산성에 입보(入保)할 수 있도록 피란을 유도하였다. 음성 지역의 경우 거대한 산성이 없어 산성방호별감이 파견되어 지킨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웃한 충주에 방호별감이 파견되어 몽고군을 막아냈고, 가까운 거리인 충주 다인철소(多仁鐵所) 등에서 항전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자체적인 항쟁의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1391년(공양왕 2) 왜구가 음성에 침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책에서는 왜구가 우왕 때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침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음성 지역 사람들은 왜구가 침입했다는 소식이 전해 오면 가까운 산성으로 들어가 일단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였을 것이다.

음성 지역 산성들에는 임진왜란 때 사람들이 왜적을 맞아 오랜 시간 농성(籠城)을 했다거나, 임진왜란으로 성을 축성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온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임진왜란 이전, 곧 고대 삼국시대부터 성문을 걸어잠그고 지키는 농성이 향토 방위의 수단으로서 운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해 오는 이야기들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이때 외적에 대항하는 마지막 입보가 행해졌기 때문인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가 함락되자 이웃한 음성과 음죽은 왜군의 보급로가 되었을 테고, 음성현 사람들은 봇짐을 싸들고 이웃한 산성으로 들어가 생명과 재산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왜구의 분탕칠로 인하여 결국 음성현은 임진왜란 이후인 1592년(선조 25) 청안현(淸安縣)에 병합되어 폐현되고 말았다. 그후 1617년(광해군 10) 현민들의 진정에 따라 복현되었으나 오늘의 음성읍원남면 일원에 불과하였다.

[향토수호의 정신을 기리며]

음성 지역에 있는 14개의 성곽들은 이미 폐허가 되고 일부는 형적조차 찾기 어렵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조사에 의해 성터는 더 증가할 가능성이 많다. 성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향토 수호와 종족 보존의 온상이었던 성곽의 실체 역시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아 있는 전설과 기록을 보충하여 향토 보전에 대한 음성군민들의 과거 노력이 더욱 세밀하게 밝혀지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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