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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애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299
한자 陰崖集
영어음역 Eumaejip
영어의미역 Collected Writings of Euma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한석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문집
관련인물 김재로(金在魯)[1682~1759]
저자 이자(李耔)[1480~1533]
간행연도/일시 1754년연표보기
권수 4권
책수 2책
소장처 규장각
소장처 주소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 56-1

[정의]

1754년에 간행된 조선 전기 문신 이자(李耔)의 시문집.

[편찬/발간경위]

6대손 이도흥(李道興)과 족종손(族從孫) 영남백(嶺南伯) 이이장(李彝章)이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유고(遺稿)를 수록하고 제가(諸家)의 문집(文集), 야승(野乘), 패설(稗說) 및 『인가고첩(人家古帖)』, 『충재일록(冲齋日錄)』 등에서 채록하여 4권 2책으로 편집하고, 새로 편집한 연보를 합하여 1754년(영조 30)에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연보(年譜), 총목(總目), 본집(本集) 4권 합 2책으로 되어 있다. 권1은 시(詩), 권2는 문(文), 권3은 일록(日錄)·잡저(雜著), 권4는 부록(附錄)이다. 각 권 앞에는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책머리에는 1754년에 쓴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서문과 6대손 이도흥이 편차한 연보가 있으며, 이어 총목이 실려 있다. 연보는 구본(舊本)이 있었으나 소략(疏略)하여 이도흥이 제가의 문집과 야승 등에서 채록하여 편집하였고, 구본이 부록되어 있다.

권1에는 시와 부(賦) 2편이 실려 있다. 시는 시체별로 오언절구 3제, 오언율시 20제, 오언배율 3제, 오언고시 43제, 칠언절구 27제, 칠언율시 16제, 칠언고시 3제가 실려 있다. 부는 「유해부(遊海賦)」, 「왕패부(王覇賦)」 2수가 실려 있다. 그 중 「유해부」는 1506년에 당포만호(唐浦萬戶)인 형 이우(李耦)를 문안하고 바다를 건너며 읊은 것이다.

권2는 문(文)으로서 책(策) 1편, 소(疏) 4편, 서계(書契) 1편, 서(書) 4편, 기(記) 3편, 발(跋) 2편, 잠(箴) 1편, 상량문(上樑文) 2편, 비문(碑文) 1편이 실려 있다. 이 중 「청환삭유자광익대훈록소(請還削柳子光翊戴勳錄疏)」는 1513년 11월에 홍문관 동료와 같이 유자광의 죄를 논하고 익대훈록(翊戴勳錄)을 삭제하기를 소청(疏請)하는 내용이다.

간신 유자광이 현신(賢臣)을 무함하여 해하고 간신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임금을 속이고 국권을 농락한 죄를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옥사를 일으켜 현신을 해한 대가로 얻은 익대공신(翊戴功臣)의 위호를 삭탈해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여유종룡서(與柳從龍書)」는 복상중(服喪中)이던 1512년 12월에 유운(柳雲)에게 보낸 것으로 소릉사(昭陵事)를 논한 편지이다. 「선판기(船板記)」는 1531년에 충주 토계(兎溪)에 있는 몽암(夢庵)이 작아 주에서 패선(敗船)을 빌려 조금 고쳐서 안식처로 삼고 그 선판(船板)에 쓴 것이다.

발(跋)은 「발인재유고(跋麟齋遺稿)」와 「발상우당시(跋尙友堂詩)」인데 「발인재유고」는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에 용인의 사암(思庵)에서 고조의 유고를 편차(編次)하고 쓴 발이고, 「발상우당시」는 상우당(尙友堂) 허종(許琮)의 시집에 쓴 발이다. 상량문은 「사암상량문(思庵上樑文)」과 「몽암상량문(夢庵上樑文)」인데 「사암상량문」은 1516년 용인의 부친 묘에서 재숙(齋宿)하기 위해 지은 사암의 상량문이고, 「몽암상량문」은 충주 토계에 지은 몽암의 상량문이다.

권3은 일록(日錄)과 잡저(雜著)로 되어 있다. 일록은 1509년(중종 4) 윤9월에 시작하여 1516년(중종 11) 12월에 마쳤는데 시정(時政)의 득실과 인물의 현사(賢邪), 천재시변(天災時變) 등을 기록한 것이다. 중간에 신미(辛未)·임신(壬申) 연간과 을해(乙亥)·병자(丙子) 연간의 기록이 없는 것은 저자가 복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잡저는 「우견안포초소록병서편말(偶見安圃樵所錄並書篇末)」, 「관서봉사록(關西奉使錄)」, 「서일록말(書日錄末)」, 「자서(自敍)」, 「기갑자사화(記甲子士禍)」, 「기권달수피화사(記權達手被禍事)」의 6편이다. 이 중 「관서봉사록」은 1510년에 명을 받들고 평안도에 가서 용천인들이 강을 건너 사냥하다가 탕참(湯站)에 갇힌 일을 교섭하여 처리하였을 때의 기록이며, 「자서」는 자찬행장(自撰行狀)이다.

이 일록과 잡저 6편 가운데 「우견안포초소록병서편말」, 「서일록말」, 「자서」 및 권2의 「청환삭유자광익대훈록소」, 「여유종룡서」, 「발상우당시」는 『대동야승(大東野乘)』권6에 수록된 「음애일기(陰崖日記)」에도 실려 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

권4는 부록으로 「행장(行狀)」(盧守愼 撰), 「묘갈음기」(族孫 李海昌 撰)와 저자가 향사된 팔봉서원, 문헌서원에 관한 기록과 「언행척록(言行摭錄)」, 「시장(諡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언행척록」은 『기묘록(己卯錄)』, 『충재일록(冲齋日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형 「이운 묘지명」(金安國 撰), 「권벌행장」(李滉 撰) 등에서 저자와 관계있는 기록을 뽑아 집록한 것이며, 「시장」은 김정(金淨)·이우(李堣)·김안국(金安國) 등의 글 중 저자와 관계있는 시를 모으고 김안국이 지은 저자의 부친과 부인 채씨의 만시(輓詩)를 모은 것이다. 책 말미에는 1746년에 쓴 권만(權萬)의 발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이자는 16세기 전반 성리학의 이상을 조선 사회에 실현하려는 사림파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묘사림(己卯士林)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南袞)·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내며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하였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이자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숙청되었다. 그 후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이러한 이자의 사상은 저서인 『음애집』에 잘 드러난다. 특히 『음애집』 가운데 「보상책(輔相策)」은 현명한 재상이 있어야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안정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예로부터 신하로서 보상(輔相: 대신을 거느리며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림)의 도리를 다한 주공(周公)을 비롯해 많은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나라에 어진 보상이 없어 정사가 어지러워짐을 개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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