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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2174
한자 金世弼-逸話
영어의미역 Anecdote of Gim Sepil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상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인물담|지명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김세필|성종|김안국|박상|설광
관련지명 말마리|지비천
모티프 유형 지비천과 말마리의 유래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김세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김세필의 일화」는 음성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세필(金世弼)[1473~1533]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김세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그후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사사되자 중종의 과오를 규탄하다 유춘역에 장배되었다가 1522년에 풀려난 뒤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 교육에 힘썼다. 지천서원에 봉안되어 있다.

[채록/수집상황]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일대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로, 2005년에 출간한 『음성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김세필은 젊어서부터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 닭이 울어도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야간 순찰을 하는 군졸들이 공이 매양 글 읽는 소리를 엿듣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멀지 않아 이 댁에 야순을 보고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렇듯 비상한 노력과 비범한 재질이 있어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오르게 되었다. 성종이 친히 여러 유생을 시험 보일 때 공이 18세로 수석을 하자 기특하게 여기면서, “세필은 비상히 큰 그릇이니 마땅히 그 재주가 노성(老成)함을 기다려서 크게 쓰리라.” 하고 그의 급제 환수를 명하고 특히 많은 상품을 하사하였다.

김세필이 1516년(중종 11년)에 경주목사로 있을 때였다. 임금이 『역학계몽(易學啓蒙)』의 강의를 받다가 해석하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 “누가 이것을 알 수 있느냐?” 하니 공을 말하는 이가 있어, 즉시 명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여 강론을 하게 하였다. 이후 공이 여주에 머물고 김안국이 충주에 있을 때 두 선생의 문하에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이때 박상이 충주목사가 되어 매년 봄 친히 여주로 가서 목사 이희보를 찾아 관의 조곡(벼) 2백 석을 받아 배로 운반하여 두 분 선생과 학도들에게 각각 나누고, 가을이 되면 다시 쌀을 싣고 가서 몸소 조곡을 갚기를 해마다 하였지만 자기의 봉록을 직접 주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를 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두 분 선생 또한 그 뜻에 감동하여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한다.

김세필이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영남으로 가다가 지금의 지비천을 지날 때의 일이다. 그때 지비천은 이름도 없는 황막한 들로서 아무도 사는 이가 없었다. 공이 말을 멈추어 한참 동안 둘러보다, “이곳이 가히 살 만하다.” 하고 점찍어 놓았다. 그후에 유춘역에서의 귀양살이가 끝나자 이곳으로 와서 조그마한 초막을 지으려 할 때, 마침 충주목사 박상이 이른바 공자당(工字堂)이라 하는 ‘공(工)’자 형의 집을 지어주었다.

양쪽이 침실로 되어 왼쪽은 김공이 기거하고 오른쪽엔 학자들이 거처하도록 했으며, 가운데는 대청으로 되어 있었다. 이에 후학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뜻맞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중 박상이 올 때마다 냇가 숲에 말을 매고 먹이를 주었는데, 오래지 않아 이곳에 차차 집이 늘고 마을이 이루어지니 이 마을을 말마리(枺馬里)라고 이름하였다.

공이 기묘사화로 인해 벼슬에서 쫓겨난 것이 마흔아홉 살 때인데, 나이 오십 살에야 49년의 삶이 그릇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행년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行年五十而知四九年之非)”라 하여 아호를 ‘지비옹’이라 하고, 집 앞을 흐르는 물을 ‘지비천’이라 한 뒤 그곳에서 그릇됨을 아는 공부를 후학에게 가르쳤다.

지비천에 살고 있을 때 김세필은 길에서 설광이라는 중을 만났는데, 설광이 “숲 아래에서 영철(靈澈)을 만나 부끄러우니 벼슬을 버리고 온 것이 아니라 벼슬에서 쫓겨 난 것일세(却慙林下逢靈澈 不是休官是官黜)”라는 시를 짓자, “반생을 뜬이름 따라 뻔뻔스레 달리다가, 흰머리 난 오늘에야 한가한 몸이 되었네만, 산 아래서 중을 만나도 부끄럽기만 하네. 벼슬을 버린 게 아니라 쫓겨났기에 말일세.”라는 시를 써주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그토록 천시되었던 중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당대 선비들의 생리와 전형적인 사유의 행동인 은거의 허점을 스스로 간파하고 지은 시였다.

[모티프 분석]

「김세필의 일화」김세필이라는 인물의 덕행·학문과 관련한 인물담이면서 지비천과 말마리의 지명유래담이기도 하다. 지명유래담은 보통 유사한 사물이나 풍수지리에 입각한 형국론, 역사적 사실 등과 결부되어 전승되는 예가 많은데, 「김세필의 일화」김세필이라는 인물의 덕행 등을 부각하면서 곁가지로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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