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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608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제규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과 관련한 학문과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우리나라에 유교가 언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유교 경전의 교육과 사서(史書) 편찬 등이 이루어졌음을 볼 때 이때 이미 유교가 문화적 요소로서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은 분명하다.

불교가 성행하였던 고려시대에도 국가 이념과 체제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유교의 이념은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과거 제도와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된 것도 고려시대로,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유교적 이념과 도덕에 기초한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였다.

유교적 이념이 생활 속에 깊숙이 전해진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으로부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이르기까지의 법전 편찬은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유교의 이념이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음성향교]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에 설립되었던 관학 교육 기관으로 유교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시설이다.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다. 성종 때에 이르러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서원으로 점차 이동하였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음성향교(陰城鄕校) 건물은 1560년(명종 15)에 세워졌다. 그 후 1870년(고종 7)과 1887년(고종 24)의 대보수 등 여러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옛날 음성현의 동쪽 1리인 지금의 음성읍 석인리에 있었는데 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충청도 음성현 학교조에는 “재현동일리(在縣東一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대성전(大成殿)·동재(東齋)·서재(西齋)·명륜당(明倫堂) 등이 남아 있다.

건물은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배움의 공간을 두고 있고, 뒤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 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를 따르고 있다. 특히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의 뒤쪽에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것은 도로 공사로 인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노비·토지·책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다만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음성향교의 학생들은 현 단위에 해당하는 15명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50명, 도호부에는 40명, 군(郡)에는 30명, 현(縣)에는 15명으로 배당되는 게 일반적이었고 음성향교 또한 그에 따른 것이다. 교수관으로는 종6품 교수(敎授)와 종9품 훈도(訓導) 등이 있었다. 이들은 교육을 맡아보고, 학생이 독서하는 일과를 매월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서원]

조선시대에 유교를 보급하고 진흥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서원이었다. 특히 관학인 성균관과 향교의 기능이 쇠퇴하면서 점차 양반들의 교육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서원에서의 교육은 주로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성리학적 탐구였다. 정원은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각각의 경제력에 따라 인원이 제한되었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경우에는 30명까지도 허락되었다.

음성의 서원으로는 지천서원(知川書院)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이 있다. 지천서원은 조선 중종김세필(金世弼)이 은거하던 곳에 김세필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서원이다. 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운곡서원은 1602년(선조 35)에 충주목사 정구(鄭逑)가 전부터 있던 백운서당에 주자를 모시고 백운서원이라 한 데서 비롯하였다. 1661년(현종 2)에 정구가 배향되면서 운곡서원이라 하였다. 1676년(숙종 2)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다가 1894년(고종 31)에 다시 지어졌다.

[사우와 영당]

음성 지역의 유교를 상징하는 또 다른 유적으로 사우(祠宇)와 영당(影堂)이 있다. 사우는 조상과 선현의 신주(神主) 내지는 영정(影幀)을 봉안하여 두고 제향을 행하고 재(齋)를 설치하여 후손들을 가르쳤던 공간이었다.

원남면에는 1744년(영조 20)에 주씨 문중에서 세운 태교사(泰喬祠)가 있다. 본래 주응동(朱應東)이 안성의 김문웅(金文雄)으로부터 주자 영정을 받아 문곡영당(文谷影堂)을 개설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쇄된 후에 다시 세운 뒤 이름붙인 것이다. 매년 춘추로 주씨 문중과 유림들이 모여 향사하고 있다. 하노리에는 무송윤씨의 사우 희암재(希庵齋)청주고씨의 사우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감곡면에는 문촌리옥산사(玉山祠)오궁리규정영당(葵亭影堂)이 있다. 옥산사는 주자와 송시열 그리고 이기홍(李箕洪)을 받드는 사당이다. 이기홍송시열의 문인으로 제주로 귀양간 송시열을 변호하다 회령에 유배된 인물이다. 폐쇄되었던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의 문산서원(文山書院)을 유림과 이기홍의 후손들이 1909년에 이곳에 재건하였다.

규정영당신후재(申厚載)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다. 신후재는 조선 현종 대의 학자로서 경신대출척과 갑술옥사 등을 겪었던 인물이다. 후에 은퇴하여 지금의 감곡면 오궁리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곳에 봉안된 영정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극면 방축리에는 도통사(道通祠)가 있다. 본래 1734년(영조 10)에 충주 지방의 유림들이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화안리에 건립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강제로 철거되었다. 이후 재건되어 향사의 기능을 했으나 군사 기지 안에 포함되어 다시 기능을 상실하였다가 1995년에 이르러 비로소 지금 위치에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공자·주자·안향을 비롯하여 권부(權溥)·우탁(禹倬)·이진(李瑱)·이재(李縡)·백이정(白頤正)·이조년(李兆年)·신천(辛蕆)·추적(秋適)·안축(安軸)·안보(安輔) 등이 배향되고 있다.

음성읍 용산리에는 1964년에 건립된 충룡사(忠龍祠)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자결한 의당 박세화를 배향한 사당이다. 금왕읍 도청리에는 초계정씨 중시조를 봉안한 도장사(道莊祠)와 그의 영정을 둔 도원사(道源祠)가 있다. 도장사에는 정창(鄭昌)·정덕기(鄭德麒)·정국주(鄭國柱)·정국추(鄭國樞)·정국량(鄭國樑)·정국로(鄭國櫓)·정국빈(鄭國彬)·박팽년(朴彭年) 등이 배향되어 있다.

[충효열 유적]

충신문(忠臣門)과 효자각(孝子閣), 열녀문(烈女門) 등은 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하여 표창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그 집 문 앞에 붉은 색으로 단장한 문을 세웠다. 음성 지역에는 많은 충효열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음성 지역의 충신문으로는 조선 태종 때의 인물인 박순(朴淳), 선조 대의 인물인 권길(權吉)·이구령(李龜齡)·장충범(張忠範), 인조 대의 인물인 김종립(金宗立), 영조 대의 인물인 남연년(南延年) 등의 것이 있다.

박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충신문은 대소면 오류리에 있다. 권길의 충신문은 소이면 갑산리에, 이구령의 충신문은 생극면 차평리에, 장충범의 충신문은 음성읍 삼생리에 있다. 김종립의 충신문은 맹동면 군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연년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서 출생한 인물로 충장(忠壯)이라 시호를 받았고, 충신문 역시 그곳에 세워져 있다.

음성 지역 유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자료는 효자와 열녀 유적이다. 우선 음성읍에는 삼생리장동엽(張東曄)청주이씨 열녀비와 장택한(張擇漢)장수황씨 효부문이 있다. 그리고 김명제(金明濟)의 효자비도 전한다. 평곡리이경립(李敬立)순흥안씨 열녀문이 있다.

청주이씨 열녀비는 1892년(고종 29)에 정려되어 세워졌으며, 장석영 효자문·장수황씨 효부문과 함께 있다. 이경립의 처 순흥안씨선조 대의 인물로 숙종 대에 열녀 정려가 세워졌고, 지금의 비각은 1903년 개축되어 관리되고 있다. 효자문으로는 삼생리장석영(張錫永) 효자문이 있다.

금왕읍에는 여러 개의 효자문이 있다. 신평리민동량(閔東亮)·민정현(閔鼎顯)·민휘계(閔徽繼), 행재리의 이광하(李光夏), 유촌리조유안(趙維顔) 효자문이 있다. 도청리에는 정규영(鄭圭永)정인상(鄭寅尙)의 효자비가 있다.

소이면 충도리에는 조용하(趙用夏) 처 평택임씨 열녀문이 있다. 남편인 조용하와 함께 정문이 내려져 효열쌍정문(孝烈雙旌門)이라 부르고 있다. 대장리신유(申維), 후미리이식후(李植垕)·이진도(李鎭道) 부자의 효자문이 있고, 비산리안중성(安中聖) 효자비, 금고리에 정의영(鄭義永) 효자비가 있다.

대소면 오류리에는 박순(朴淳)장흥임씨 열녀문이 있다. 이곳에는 박호원(朴浩遠)박정규(朴廷珪)의 효자문도 있다. 생극면 차평리에는 1742년(영조 18)에 정려된 김선경(金善慶)성주이씨 열녀문과 오창묵(吳昶黙)의 효자비가 있다. 방축리에는 민해준(閔海俊)의 효자문이 있다.

삼성면 용성리에는 권종원(權鐘源)진주정씨 열녀문이 있다. 고종 때 열녀의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한 양덕리에는 정운영(鄭運永), 용성리에는 권국화(權國華)의 효자문이 있다. 감곡면 문촌리에는 윤득성(尹得聖)청풍김씨 열녀문이 있다. 영조 대에 열녀로 포상되었고 정조 대에 정문을 세웠다. 같은 건물에 윤기손(尹起巽)윤기진(尹起震) 형제의 효자문이 있다. 상평리에는 정국량(鄭國樑)의 효자문이 있다.

원남면 문암리에는 곡산연문(谷山延門) 효열각(孝烈閣)이 있다. 이곳에는 1796년(정조 20)에 세워졌던 연진행(延震行)의 처 순흥안씨의 열녀각과 1916년에 세워진 연재관(延載寬)의 처 청송심씨의 정려와 효자였던 연사종(延嗣宗)의 정려가 함께 있다. 또한 마송리고용진(高庸鎭)의 효자문, 상당리정억성(鄭億成)의 효자비가 있다. 맹동면에는 두성리송광도(宋匡度), 통동리김순(金(石+舜))의 효자문이 있다.

이같이 음성 지역에 현존하는 유교 관련 유적은 충과 효에 중요한 가치를 두고 유교적 가치관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던 음성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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