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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51
한자 李耔
영어음역 Yi Ja
이칭/별칭 차야(次野),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풍림거사(楓林居士),문의공(文懿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음성읍 평곡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
성별
생년 1480년연표보기
몰년 1533년연표보기
본관 한산
대표관직 의정부우참찬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풍림거사(楓林居士).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참판 이형증(李亨增)의 손자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부인은 인천채씨채수(蔡壽)의 딸이다.

[활동사항]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어, 천추사(千秋使)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이조좌랑, 의성현령을 거쳐, 1506년(중종 1) 문의현령, 1509년 양천현감, 홍문관수찬, 경연검토관, 교리에 올랐다.

부친상을 당하고 경기도 용인시 기곡리에서 살면서 ‘풍림거사(楓林居士)’로 자호하였다. 1513년 복직하여 훈련원첨정 자격으로 소릉 폐출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1516년 사유(師儒)에 간택되어 부응교가 되었고 1517년 전한, 직제학에 올라 정난공신 녹훈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이후 부제학,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북경에 갔다.

1519년 예조참판, 한성부판윤겸동지경연사, 형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 의정부우참찬겸지춘추관사가 되었는데, 11월 15일에 기묘사화가 발생하여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하옥되었다. 그러나 남곤이 구명하여 이자는 파직된 후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유배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자는 1533년 12월 15일 직첩을 돌려받지 못하고 54세로 죽었다.

이자는 주계군(朱溪君)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학문이 깊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으며, 말이 온화하고 꾸밈이 없었다. 14세 때 강원도 삼척 두타산 중대사(中臺寺)에서 공부하고, 15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는데, 김안국, 정충량, 성세창, 유운 등과 동방이다. 주청부사 시절 주청사 남곤이 병을 얻어 죽게 되었을 때, 이자가 극진히 간호하여 살았으므로 남곤이 그 은혜를 갚고자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자를 돌봐 유배형으로 낮추어 주었다.

이자의 처가인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유배되어 그늘진 언덕에 집을 짓고 그곳을 음애동(陰崖洞)이라 불렀다. 일암(釰岩)바위 위에 초은정(招隱亭)을 짓고, 바위에다 ‘탁영선탑음애동(濯纓仙榻陰崖洞)’이라는 각자를 새겨 놓았다. 1529년에 다시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토계울로 옮겨 몽암정사(夢庵精舍)를 짓고 호를 몽옹, 계옹이라 하였다. 이연경(李延慶)이 충청북도 충주시 수주팔봉에 유배 중이어서 배를 타고 서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음애일기(陰崖日記)』와 『음애집(陰崖集)』이 있다.

[묘소]

묘소가 경기도 용인시 기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죽은 지 6년 만인 1538년(중종 33) 4월에 직첩을 돌려받고, 1611년(광해군 3) 한산 문헌서원에 배향하였다. 1582년 충청북도 충주시 수주팔봉에 팔봉서원을 세워 1672년 3월 27일 사액을 받아 팔봉서원(八峯書院)이라 편액하고 이자에게 유제(諭祭)의 글을 내렸다. 이때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1745년(영조 21) 종계 변무한 공훈으로 부조묘(不祧廟)를 내렸다. 노수신(盧守愼)이 행장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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