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11
한자 金宗立
영어음역 Gim Jongrib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성별
몰년 1636년연표보기
본관 의성
대표관직 군자감봉사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손자는 김문상(金文商)이다.

[활동사항]

김종립(金宗立)[?~1636]은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서 주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진천현 초관(哨官)으로서 충청감사 정세규를 따라 광주(廣州) 험천(險川)에서 적과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정세규를 찾으려 할 때 한 장교가 “지금 나와 같이 도망하여 이 위급을 피하자”하였으나, 정색하며 “네가 만일 도망을 가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하면서 남은 병사를 정돈하여 분신전진(奮身前進)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현감 이충운(李翀雲)이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 재주는 달랐도다/ 그대가 나라 일에 죽을 때에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남을 향해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라고 하였다.

진사 채진형(蔡震亨)이 전기(傳記)를 지어 김종립의 충절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나 조정에서의 포상이 없었다. 1704년(숙종 30) 손자 김문상이 상언하자, 조정에서 김종립의 충절을 인정하여 정려(旌閭)를 명하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하였다. 이듬해인 1705년(숙종 31)에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에 ‘충신정려문’을 건립하였으며,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찬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