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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와당(簡窩堂)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E010501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기범

사정1리 강당말용대동부용산 자락에 마을을 이룬지 400여 년이 지났다. 그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마을 사람은 산자락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유형의 문화유산을 풍성하게 남겨놓았다. 특히 음성군의 향토문화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간와당은 물론 마을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는 교지, 계문서 등 각종 오래된 고문서, 그리고 마을에 남아 있는 소외양간, 공동우물, 담배건조실 등도 소중하게 보존되어야 할 문화재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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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읍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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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현지도상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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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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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문헌에 나타난 사정리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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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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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와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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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와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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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와당 안내판

간와당은 강당말이란 마을 이름이 있게 한 강당을 일컫는 이름이며, 음성군향토문화유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간와당이란 당호는 최근에 문중에서 김혜공의 호인 간와를 따서 간와당이라 한 것이다.

강당말에 강당이 세워진 유래에 대하여 마을 사람들은 “안동김씨 18세인 수찬 벼슬을 하던 혜(憓) 할아버지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가인 금왕 초계정씨가 사는 곳으로 난리를 피하러 내려왔다가 이곳 산골짜기가 깊은 부용산 아래 사정리로 들어와 피신하여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강당을 세웠으며 그 강당 때문에 마을 이름이 강당말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에는 살펴볼 점이 있다. 임진왜란을 피하여 피난을 와서 마을의 터전도 마련하기 어려웠을 텐데 과연 어떻게 강당을 지었을까 하는 점이다.

따라서 김혜공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음성읍지』, 전해 내려오는 족보의 기록으로 인물 및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강당의 역사를 추증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김혜공이 임진왜란을 피해 사정1리 현재의 강당말에 세거지로 정하게 되고, 1594년(선조 27)에 도감비변랑, 1605년(선조 38)에 호조좌랑, 1606년(선조 39)에 대구판관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 간악한 무리들에 의하여 조작된 대역의 옥사가 일어나게 되고 이에 김혜공이 연루되게 된다. 그리고 연루자들에게 친국에 따른 문초, 압슬 형이 가해지게 되지만 김혜공은 연루되지 않았으므로 자복을 하지 않는다. 이후 1619년(광해군 11)에 함경도도사가 되었다. 이때 비변사에서 왕에게 함경도도사인 김혜공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왕은 그 요구에 따라 김혜공을 교체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볼 수가 없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김혜공이 1619년(광해군 11)에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사정1리 강당말로 들어와 1637년(인조 15)까지 살았으니 약 18년 정도 살았을 것으로 볼 때, 벼슬에서 물러나 사정1리 강당말로 들어온 때부터 후세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강당말의 약 400년 역사가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강당말 강당의 위치와 연혁에 대하여 강당말 김두일 새마을지도자(52년생, 56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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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일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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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재배지(김두일)

“강당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마을 입구 느티나무와 팔각정자, 마을비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되는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왜정시대에 동학란 때 일본 사람이 딱성냥 같은 것으로 마을에 불을 지를 때 마을도 다 타고 이때 강당도 모두 탔다고 하거든. 또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잡으려는 일본 경찰이 불을 질러 마을도 타고 강당도 탔다고 해. 그래서 지금 그곳에다가 1930년대 말인가 그때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 대들보에 그 날짜가 있을 거야. 그때 나는 태어나지 않았지. 그리고 옛날 강당이 있던 터에 강당샘이라는 우물이 하나 있어. 이런 얘기도 있지 일본군에 쫓기던 동학군이 사정고개 밑에서 죽었는데 거기에 동학무덤이 있어. 다 어른들한테 들은 이야기지”

강당에 대해 정리해 보면 강당은 본래의 위치에서 1907년 의병과 일본 군사들의 싸움으로 마을이 모두 불탈 때 강당도 타버렸으며, 그 후 32년 동안 복원되지 못하다가 1939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여 놓았다. 강당 상량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당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평면구성은 3공간으로 나누고 있는데, 정면 5칸 중에서 가운데 3칸은 통간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양쪽 1칸은 온돌방으로 하고 있다. 건물 창호는 가운데 칸 중에서 중앙 칸은 여닫이 띠살문, 양옆 칸은 4분합의 띠살문으로 하고 있으며, 양쪽 끝 칸은 가운데 칸보다 작은 띠살문으로 하고 있다.

강당말 강당에는 조선시대부터 강당을 운영하기 위한 강당계인 강계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강계는 1951년부터 흥학계로 명칭이 바뀌었다. 강계와 흥학계는 강당의 수리, 보존, 그리고 서당과 간이학교 역할에 따른 학자금 마련을 위한 계였다.

강당말 강당은 조선시대부터 마을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공회당 및 서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시대에 각 지역에 오늘날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가 세워질 때 미처 설립되지 않은 지역에 간이학교가 세워졌는데, 사정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간이학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강당말 강당은 마을의 역사적 자료이면서 근대 기념물적인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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