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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1009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걸순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북도 음성군의 역사.

[연혁]

조선 초기 음성 지방은 고려의 지방제도와 같이 충주목에 속한 4속현(영춘·제천·음성·연풍)의 하나였다. 음성현은 1413년(태종 13)의 지방제도 개편 때 현감을 두었으나 규모가 매우 작아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충주 제천에 이르기까지 7리, 서쪽으로 충주 건천에 이르기까지 17리, 남쪽으로 청안에 이르기까지 26리, 북쪽으로 충주 석적산에 이르기까지 19리”에 불과하였다. 호구는 171호에 726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이 33명, 선군(船軍)이 46명 규모였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음성의 명칭으로는 잉홀과 함께 설성(雪城)과 잉근내(仍劤內)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음성은 폐현과 복현을 거듭하였는데, 1662년(현종 3)에 폐현되어 괴산군에 병합되었다가 이듬해인 1663년(현종 4)에 군으로 복구되었다. 이후 음성은 동도면·남면·원서면·근서면 등 네 개의 면으로 유지되었다.

[경제]

음성 지방은 토지가 메마르고 기후가 차서 토산물로는 오곡과 조·팥·닥나무 등이 잘 자랐으며, 토공(土貢) 물품으로는 꿀·밀·대추·칡·족제비털·잡깃·잇[홍화(紅花)]·지초·종이·잘[산달피(山獺皮)]·여우가죽·표범가죽 등이 유명하였다. 또한 약재로는 산골·인삼·복신이 산출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인구와 산물이 쇠잔하였다. 음성현은 특히 임진왜란 때 인근 지역과 함께 왜적의 분탕질로 인해 피해가 막심하였다. 결국 음성현은 현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어 이웃의 청안현에 병합되고 폐현되고 말았다. 그후 1617년(광해군 10) 현민들의 진정에 따라 복현되었으나 오늘의 음성읍원남면 일원에 불과하였다.

당시 음성의 피폐한 정황은 현감으로 부임한 김육(金堉)이 1624년(인조 2)에 올린 「진폐소(陳弊疏)」에 잘 나타나 있다. 「진폐소」에 보면, ‘음성현은 인구와 산물이 호서 8로 중에서 가장 쇠잔하며, 민호가 가난하여 유망이 계속되었으며, 수년간 열 집 중 일곱에서 여덟 집이 망하여 각종 조세를 부담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의 해결 방안으로 현의 지경 분할을 균일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즉 이전처럼 청안과 합병하든지, 아니면 음성을 둘러싸고 있던 충주의 일부를 떼어 주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향촌사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보면 음성 지역의 토착성씨로는 토성(土姓)으로 박(朴)·채(蔡)가 있으며, 망성(亡姓)으로 송(宋)·윤(尹)·경(敬)·정(鄭)의 4성이 있고, 속성(續姓)으로 최(崔)·이(李)·신(申)의 3성이 있다고 하였으나, 그후에 제작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본현에 송(宋)·이(李)·경(敬)·정(鄭)·박(朴)·채(蔡)·최(崔)·이(李)·신(申)이 있는데 모두 속성”이라고 하고, “파천(巴川)[지금의 보천]에 채(蔡)·이(李)·경(敬) 3성이 있다”고 적고 있다.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음성 지방은 4면 19리, 1,828호, 8,502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30년이 지난 기록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2개 리가 증가한 21개 리로 기록되었으나 인구는 6,951명으로 현저하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주요 사건]

1886년(고종 23) 2월, 충청감사 심상훈(沈相薰)은 「음성현적도사(陰城縣賊徒事)」라는 제목의 장계를 올려 음성에 적도가 창궐하고 있음을 조정에 알린다. 충청감사는 이 장계에서, 이 같은 상황은 이전에는 없던 변괴로서, 곧 음성의 적도들을 체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동년 5월 10일 심상훈은 다시 장계를 올려, 음성에 돌입한 화적 7인을 체포한 공을 세운 전 충주영장 김재풍(金在豊)의 포상을 상신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시 화적들은 민가의 재물을 탈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청까지 공격하였는데, 충주에서 포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 발발 직전 음성에서도 화적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음성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동학농민봉기의 시대적 배경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동학을 창도한 최시형은 충청도의 청주와 충주를 왕래하며 포교를 하였다. 최시형은 특히 귀천과 적서의 차별 폐지를 주장하여 농민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최제우는 충주에 여러 차례 머물며 포교를 하였는데, 충주의 동학 근거지는 외서촌(外西村)이었다.

외서촌은 당시 동학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외서촌은 현재 음성군 금왕읍대소면·삼성면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금왕읍 내송리 비선거리는 외서촌의 관문이었다. 당시 외서촌은 충주목 관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도둑이 들끓었으며, 관리들의 가렴주구도 극심하였다.

동학의 진압 기록인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와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등의 교단기록에 의하면 충청도 일대의 주요 지도자 중 음성에는 별도로 대접주 조직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인근 지역인 충주 외서촌이나 진천·청주의 대접주 조직이 음성을 관할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에는 괴산과 음성의 지도자로서 홍재길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1893년의 보은집회는 19개 포의 대접주가 참가한 전국적 규모였으나, 음성 지방 동학도들의 참여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893년 4월, 동학도들이 청주와 충주의 경계 부근에서 집회를 하였다는 기록이나, 보은의 동학도가 해산할 때 청안접 100여 명, 청주접 290여 명, 목천접 100여 명이 떠났으며, 사잇길로 산외면 원평리에서 충주로 간 동학도가 1천여 명이라는 기록 등이 음성 지역 동학도의 동향을 알려 준다.

1894년으로 들어서면서 충청 지역의 동학은 그 세가 더욱 커져 갔다. 이즈음 동학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병한 청과 일본군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음성과 그 주변 지역에도 수시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나타나 지역민을 놀라게 하였다. 청주로 온 청나라 군사는 청안을 거쳐 북상하였고, 일본군은 수안보·연풍·충주로 이어진 병참로를 통해 북상하였다.

충청감사 이헌영(李憲永)의 기록에 의하면, 충주로 퇴군한 청군의 수는 무려 6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충주군수가 이들에게 음식과 돈을 제공하였음에도 청군의 약탈상이 극심하였다. 충주 일원의 주민들은 마을 부근의 높은 언덕이나 산에 보루를 쌓아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이 해 7월경에는 동학 조직이 충청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충주 일원은 읍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학 세상이 되어서 동학도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관리들은 동학 세력에 눌려 감히 탄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일부 양반들은 농민군으로부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른바 민보군을 조직하여 대항하기도 하였다.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동학이 재봉기(9월 기포)하자, 정부는 이두황이 이끄는 경군을 보내 농민군을 진압하려 하였다. 그런데 9월 22일 충주 외서촌 미산에 거주하던 대접주 신재련이 “농민군이 집결한 것은 허문숙(許文叔)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내용의 방문을 이두황 군이 머물고 있는 죽산에 내걸었다.

당시 충주 용산포에는 허문숙과 서장옥이 이끄는 5~6만의 농민군과, 신재련이 이끄는 4~5만의 농민군이 광혜원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곧 접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두황신재련의 말을 믿지 않으며, 죽산에 파견된 경군만으로는 농민군을 상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죽산 관아 뒤의 비봉산 좌우 산록에 군사를 배치하고 일본군의 남하를 기다렸다. 이같은 이두황의 경군 배치는 외서촌 부근 농민군의 강대한 세력을 가늠케 한다.

이두황은 9월 24일 외서촌과 광혜원의 양 진영에 효유문을 보내 농민군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광혜원에 주둔한 농민군은 9월 25일 음죽 관사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두황은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9월 28일 별군관 이겸래를 서울로 파견하여 증원병과 군수물자를 요청하였다.

음력 10월 초까지 진천과 충주 외서촌에 모인 농민군은 이웃 군현을 공격하면서 무장을 강화하고 군수미를 확보하였다. 음력 10월 초 광혜원의 농민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삼호리 전투를 치르면서 무극으로 이동하였고, 진천 공격 이후 구만리 장터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도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무극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의 계속적인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무극을 떠나 감우재를 넘어 음성의 당동(현재의 원남면 상당리하당리)에 주둔하였다.

10월 6일에는 수만의 농민군이 괴산을 공격하여 일본군 1명, 읍리와 부민 11명을 죽이고 3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괴산을 함락했던 농민군은 괴산을 떠나 청주 근방에서 주둔하였다. 10월 10일, 이두황 부대가 음성에 도착하였고, 일본 공사가 출정 중인 남부병참감(南部兵站監)에게 충청도 괴산·충주·청주 일원의 농민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월 11일에는 이두황 부대가 청안에 도착하여 음성 매란동 접주인 송병권(宋秉權)과 곽영식(郭永植) 부자를 체포한 뒤 송병권을 총살하였다. 경리청 성하영은 음성에 도착하였으나 농민군이 이미 흩어져 버렸으므로 청주로 향하였다. 10월 14일 이두황은 장내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박공선(朴公善)이라는 자가 음성현의 군기를 탈취하였다는 제목으로 체포하여 총살하였다. 이에 의하면 일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음성현의 무기고가 동학도에게 습격당하여 무기가 탈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10월 21일 음성현감 윤필(尹弼)이 무기를 빼앗긴 죄로 파직되었다.

이러한 자료와 사건들로 미루어 볼 때 음성 지역의 동학은 교주 최시형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음성이 포교의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의 동학도들은 보은 취회와 관련이 있으며, 제2차 봉기 때 대규모로 봉기하여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는 등 격렬히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세한 동학농민군의 수나 이동 상황, 지도자 및 전투 상황과 결과 등에 대하여는 자료의 결핍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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