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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60
한자 趙仁沃
영어음역 Jo Inok
이칭/별칭 군계(君啓),충정공(忠靖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유봉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몰년 1396년연표보기
본관 한양
대표관직 중추원부사

[정의]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군계(君啓). 판도판서(判圖判書) 조돈(趙暾)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조인옥은 1373년(공민왕 22)에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고 1387년(우왕 13)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의 휘하에 종군하여 최영(崔塋) 등 구세력 숙청에 가담하였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남은(南誾) 등과 더불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비밀리에 의논하였는데 이성계가 이를 알고 제지하였다.

위화도 회군에서 큰 공을 세워 토지와 가택(家宅)을 받았고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고 회군공신이 되었다. 1389년 이성계·정도전 등과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창왕(昌王)을 옹립하였으며, 신진 세력의 중심 인물로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에 따라 여자가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자고 건의하여 제도화하는 등 신진 세력의 기반을 닦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으나 1392년 이성계의 천거로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공신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고 개국 1등공신에 올랐다.

1395년(태조 4)에 한성군(漢城君)에 봉해지고 다음 해에는 정조겸성절사(正朝兼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평소 사서(史書)를 즐겨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사대부가 많이 따랐다.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조인옥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이 『통감(通鑑)』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조인옥은 인물이 헌출하고 엄하고 씩씩하여 사람들이 감히 똑바로 보지를 못하였다. 허튼말이 없고 희노(喜怒)의 빛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며, 지조가 높고 단단함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또 조정에서 응수하는 재주가 있으므로 명나라 사신이 오면 항상 접대를 맡았다.

[학문과 사상]

정도전 등과 더불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도착하여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놀 때 정도전이 「강지수사(江之水詞)」를 지어 자기의 의사를 밝히니, 조인옥이 붓을 들고 발문(跋文)을 썼는데 대단히 아름다워서 정도전이 크게 칭찬한 일도 있었다 한다. 조인옥의 주위에는 사대부가 많이 모여들었고, 개국공신의 신진 사대부 세력으로서 유교주의 정신에 철저했던 인물이다.

[저술 및 작품]

정도전의 「강지수사」에 응대했다는 발문이 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산리에 묘소가 있으며, 부조묘는 충정사(忠靖祠)라 하여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 경무공(景武公) 이제(李濟), 양열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 강무공(剛武公) 남은(南誾) 등과 함께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05.06 내용 수정 음보로 생원->음보로 산원(散員)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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