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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50
한자 李-土-寅-
영어음역 Yi In
이칭/별칭 야수(野叟),소옹(素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
성별
생년 1608년연표보기
몰년 1669년연표보기
본관 벽진(碧珍)
대표관직 형조참의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야수(野叟), 호는 소옹(素翁). 아버지는 병조참의 이상급(李尙伋)이다. 아들은 이지술(李志述), 이지도(李志道), 이지규(李志逵)이다.

[활동사항]

15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장성하여 장유(張維)에게 수학하였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에 올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여 원종훈(原從勳)에 오르고, 1642년 대과에 급제해 검열, 대교, 봉교를 거쳐 전적, 감찰, 지평으로 전직되었다.

수년간 예조낭관과 성균관직강을 번갈아 하다가, 1645년 은산현감, 석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48년 개성경력, 1649년 영광군수가 되었다. 1651년 예조정랑으로 영남재상어사가 되었는데, 이명 도당이 허위로 모함하여 원성(原城)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사면되어 1657년 직강겸어영청낭관, 북청판관, 1658년 사예, 양양부사, 안동대도호부사, 1659년 강계부사로 승진하였다.

1661년 정주목사, 1662년 의주부윤, 1664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종성부사, 성주목사가 되었는데 역마가 죽어 경기도 양주로 유배되었다. 1666년 풀려나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 배미로 돌아와 걸해상소(乞骸上疏: 해골을 고향에 묻겠다는 뜻으로 관리가 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67년 형조참의에 제수되고, 제주목사에 임명되었다가 관사에서 졸하였다.

[학문과 사상]

이인은 강직하고 준엄하며 방정하여 이해(利害)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만사(輓詞)에서 “평생 동안 정직한 도를 지켰으나 벼슬길이 막혔고,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낮은 고을살이에 머물렀다.”라고 하였다.

[묘소]

묘소가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 배미에 있다. 권상하가 묘지명을, 정호가 행장을 찬하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4.28 본관 수정 <변경 전> 성주 <변경 후> 벽진(碧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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