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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08
한자 金世弼
영어음역 Gim Sepil
이칭/별칭 공석(公碩),십청헌(十淸軒),지비옹(知非翁),문간공(文簡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 명례방
성별
생년 1473년연표보기
몰년 1533년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관직 예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세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지비옹(知非翁). 두문동충신 김자수(金自粹)의 고손이다. 할아버지는 원종공신 김영유(金永濡)이고 아버지는 충주목사 김훈(金薰)이다. 어머니는 진천송씨로 군수 송학(宋翯)의 딸이고, 부인은 고성이씨로 부사 이탁(李鐸)의 딸이다. 아들은 김숙(金䃤), 김구(金瞿), 김저(金䃴)이다. 고손은 김정현(金鼎鉉)이다.

[활동사항]

김세필(金世弼)[1473~1533]은 서울 명례방에 살면서 젊어서부터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 닭이 울어도 그칠 줄 몰랐으며, 할아버지 김영유의 옛집이라서 야순 군졸들이 매일 글소리를 엿듣고 “우리들이 멀지 않아 이 댁에 야순을 보고하게 될 것이다”하였다고 한다.

1490년(성종 21)에 유생 시험을 볼 때 18세로 수석으로 합격하자 기특하여 낙하(落霞) 운자를 부르자 즉석에서 시를 지어, 성종이 “그 재주가 노성함을 기다려 크게 쓰리라”하고 많은 상품을 주고, 또 관학 유생에게 제술 시험 보일 때 19세로 으뜸을 하여 쌀과 호초등을 내려 주어 한때 젊은 선비들이 흠모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군 4) 홍문관정자겸경연전경(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에 임명된 후,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고,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청풍(淸風)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거제도로 옮겨 「나그네의 회포」를 읊었다.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부교리, 교리를 역임하였고, 1507년(중종 2) 이조정랑으로 유자광(柳子光)의 극형을 논핵하고, 1508년(중종 3) 검상(檢詳)·사인(舍人)·응교(應敎)를 지내고, 1509년(중종 4) 대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늙어 사양하였다.

1510년(중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副提學), 1511년(중종 6) 우부승지·예조참의·사간원대사간, 1512년(중종 7) 병조참지·우승지·전라도관찰사·대사성·사간원대사간·광주목사를 거쳤다. 1519년(중종 14)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이조참판·형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다. 1520년(중종 15) 황해도관찰사·성균관동지로 있다가, 9월에 ‘시비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유춘역(留春驛)에 유배되었다가 1522년(중종 17) 귀양에서 풀려났다.

김세필은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며, 속임과 겉치레가 없었다. 박원종(朴元宗)유자광(柳子光)의 말을 믿고 언제 사화(士禍)를 일으킬지 모르게 되었을 때 김세필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박원종으로 하여금 마침내 유자광을 귀양 보내게 하였다.

호남의 감사(監司)로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세밀하게 살피고자 하여 곧바로 처결하지 않고 부서(簿書)를 쌓아두어 밀리는 일이 많았다. 김세필을 헐뜯는 자들은 이를 두고 업무 처리를 제대로 못한다고 비난하였다. 또 재상(災傷)의 형편을 살필 때에는 국고(國庫)가 넉넉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조금이라도 수확이 될 만한 곳에는 모두 1등을 더하니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옛날에는 군(郡)을 다스리다가 공명을 손상한 사람이 있더니, 이 사람의 명망은 외보(外補) 때문에 도리어 적어졌다”하였다.

지중추부사로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도신리 도관원리에 살았다. 김세필생극면 팔성리 지비천(知非川)에 공당(工堂)을 지을 때 충주목사 박상(朴祥)이 도와주었는데, 말을 매던 촌락이 ‘말마리(秣馬里)’ 마을이 되었고, 유생들이 모여들어 제방 둑에 말 매던 곳을 ‘말개뚝’이라 하였다.

또한 김세필이 ‘마흔아홉 살에 벼슬에서 쫓겨나고, 50세에 49년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하여, ‘지비옹(知非翁)’이라 부르고, 집 앞에 흐르는 물을 ‘지비천(知非川)’이라 불렀으며, 공당은 이후에 ‘지천서원(知川書院)’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십청헌문집(十淸軒文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746년(영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김안국이 행장을 찬하였으나 병화로 없어지고,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찬하였다. 1672년(현종 13) 충주 유생 한치상(韓致相) 등이 “서원 창건 60년간 제사 지냈으므로 편액을 하사해 달라”고 상소하여 3월 27일 지천서원(知川書院)이 편액되었다. 11월 2일 충청북도 충주시 팔봉서원에 편액되어 봉향하고, 치제(致祭)할 때 유제문(諭祭文)이 내려졌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경주김씨의 후손으로 송백 같은 지조를 지녔도다. 어찌 문장에만 능할 뿐이었겠는가. 학문을 겸하여 배양하였기 때문에 그 경지가 어디서라도 진리를 터득할 수 있으므로 처지에 따라 사리에 밝았도다. 조정의 높은 지위에 올라서는 어진 인재를 잇달아 천거하여 나오게 하였으며, 경연에 임하여서는 충심을 다하여 아뢰었으므로 지방에 있을 적에는 조정에 일이 있으면 역마를 달려 불렀도다.

허물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여 임금을 선(善)으로 인도하려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충성에는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았으니 어찌 화의 기미를 두려워하였겠는가? 쓰이고 쓰이지 않는 것은 천명이라 나아가고 물러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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