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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706
한자 驛院
영어음역 Yeogwon
이칭/별칭 역관(驛館),역참(驛站),우역(郵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걸순

[정의]

전통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설치된 통신 및 교통 제도.

[개설]

역원(驛院)은 역관(驛館), 역참(驛站), 우역(郵驛)이라고도 하였는데, 신라 소지왕 때인 487년(소지왕 9) 처음으로 우역(郵驛)이 설치되었다. 그 뒤 통일신라시대 이후 9주(九州) 5소경(五小京)이 설치되는 등 지방 제도가 확립되고 중앙 관리의 지방 출장 및 상인과 여행자의 왕래가 증가함에 따라 그 기능이 활발해졌고, 고려시대에 오면서 더욱 발달하였다.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 숙박 및 공물 진상 등의 관물 수송을 담당하던 곳으로 참(站)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다가 1597년(선조 30)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파발을 두어서 변서(邊書)의 급한 전달을 임무로 하였다.

원(院)은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으며, 각 도의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점심을 먹거나 마필을 교체하는 곳으로도 쓰였다. 또한 원은 민심을 파악하거나 고을 수령들에 관한 내사(內査) 자료를 얻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원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통상 각지의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믄 곳에 역과 함께 설치되었다. 고려 때 역제도(驛制度)에는 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성종 때에는 공무 여행자를 위한 관(館)이 설립되었다. 관은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는데, 몽고족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운로(漕運路)가 막히자 육로와 내륙 수로를 이용할 때 사설 기관으로 보급되었고 불교식 명칭을 가지고 있어 사찰에서 건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원이 제도적으로 발전된 시기는 조선 초기로, 고려시대의 사원(寺院)이나 역원이 원으로 전환된 경우도 있고 개인 소유의 주택이나 누정(樓亭)을 개조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황폐화되어 조선 후기에는 대부분 소멸되고 전국에 100여 개만 남아 있었으며, 그 성격도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는 사례가 많았다.

[역사적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충청도 충주목 음성현조에는 감원(坎原)과 용안(龍安)의 2개소에 역이 있었는데 연원도(連原道) 관할 6역 중의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충청도 음성현조의 역원에는 현의 서쪽 1리에 감원역(坎原驛)이 있고, 현의 남쪽 9리에 양혜원(楊惠院)이 있으며, 현의 서쪽 19리에 장신원(長信院)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원역에는 상등마 1필을 비롯하여 7필의 말과 22명의 노비들이 있었다고 한다. 용안역(龍安驛)에는 대마 2필을 비롯하여 14필의 말과 184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현황]

감원역지(坎原驛址)충청북도 음성읍 읍내4리의 남천동 일대로서 지금도 역말[驛村]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용안역(用安驛)은 고려시대의 요안역(遙安驛)으로 용안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에 해당한다. 원 터로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오갑초등학교 북서쪽 300미터 지점 국도 38호선이 지나가는 마을 앞쪽과 포도 과수원 일대에서 기와 조각이 채집되어 그 흔적을 알려 준다. 이 지역의 마을 이름인 원거리(院巨里)도 원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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