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8일의 상주군 화북면 문장산(文藏山)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화북면 장암동(壯岩洞) 구장인 이성범(李聖範)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 인근 지역에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오후 2시경이 되자...
-
3·1운동 때 청주와 인근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게 한 독립운동가. 『매일신보(每日申報)』 판매업을 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월 1일 광무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키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가 후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
-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단식, 순절한 애국지사. 청주 지방의 유생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펼치는 한편,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여 일제의 호적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았으며 납세와 부역 등을 거부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1913년 2월 일본 헌병에 피체되었으나 단식투쟁으로 동년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 이어 5월 청원군 오창면(梧倉面)...
-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방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상해...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청원군 북이면 면사무소 서기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월 1일이래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는 것에 자극을 받아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8시경,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북이면 신기리 주민을 규합하여 근처 신대리 앞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중...
-
노동운동 등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金光濟) 등 동지와 함께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고 간사로 활동하였다. 동회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인격 및 지적향상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로서 주로 지식계몽에 주력하였다. 그는 또한 1920년 5월 31일 서울에서 다수의 동지들과 물산장려·상부상조·인권평등에 의한 세계평화의...
-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趙仁元)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태극...
-
1919년 성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17년 3월 장일환(張日煥) 등 숭실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들과 비밀결사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조직하여 서기 겸 통신원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동년 6월에는 노덕순(盧德淳) 등과 함께 식지(食指)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血書)하고 국민회의 단결과 장래의 활동방침을...
-
1919년 3·1운동 당시 청주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비롯된 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3·1운동의 전국 확산은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충청도지방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자는 천도교 측의 인종익(印鍾益)이었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청주에서는 3월 2일 「독립선언서」 268매가 발견되어 관련자가...
-
민족대표의 수장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1897년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된 그는 동학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세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국내의 인재들을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교도들을 지휘하여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이라는 신생활운동을...
-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12년 4월 중국 항주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4월 중국군 중교(中校)로 항주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39년에는 중경(重慶)으로 이전한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
-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이용실(李容實)·이수란(李水蘭) 등과 함께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부터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은 태극기를 빼앗으며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그를 주재소로 연행하여 감금시켰다.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주재소로 몰려들어...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구한말 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을 강제 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해로 망명,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2년 이후 동제사, 신한혁명당 등 각종 독립...
-
국권회복운동과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7년 4월에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노력하였고, 귀국 후 3·1운동에도...
-
3·1운동 때 청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던 독립운동가. 1919년 당시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재학생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하였다. 그는 3월 9일 청주농업학교(淸州農業學校) 기숙사로 가서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어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43년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집 당하여 중국 남경지구(南京地區)의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44년 5월 한국광복군에 입대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군을 탈출한 후 우선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어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하여 토교...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군내 최대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해가자 군중들과 주재소로 쇄도하여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35세 때에 청주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 목사로 옮겨 재임하던 1919년 2월, 동지의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신형식(申亨植)·신학구(申學求) 등 문중 사람들과 같이 3월 30일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후 일경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였다가 1920년 9월에 동지인 이종만(李鍾萬)의 집에서 신형식 등과 비밀리에 회합하여 상해 대...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박우동(朴雨東)과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동리에 돌리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4월 1일 거사 당일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전날 격렬한 만세시위로 인해 대규모...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경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신성휴(申聖休) 등과 같이 군중 1천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때 출동한 일본 헌병이 주도자를 연행해가자 그는 시위군중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연행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을 하는 등 격렬히 항의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학규 지대장이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어 남경지구(南京地區)에서 초모활동과 군사훈련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일제 강점기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1년 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학사(耕學社)의 조직에 참여했고 일시 신흥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 때에는 39인의 대표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였다. 1919년 대...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오후 1시경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에서 이수란(李水蘭)·신경구(申敬求) 등 동지들과 같이 1천 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신경구 등 동지를 연행해 가자 그는 군중들을 인솔하여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전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항...
-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장터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30일 청원군 미원 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인근의 미원 헌병주재소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격분한 그는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로 쇄도하여 투석전을 전개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사태의 위급함...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의열단에 참여하고, 구미 열강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신규식(申圭植)[1879~1922]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일제의 학살 장면 등의 사진 50매를 임시정부에 전달하여 일제의 잔인성을 세계에 폭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연유해서 1919년 1...
-
충청북도 강내면에서 횃불시위를 주도하여 인근지역의 만세시위를 파급시킨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밤마다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 산위에서 부락민 수십명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첫날인 23일에는 면내의 18개 부락과 인접한 강외·옥산·남이면 등지에서도 호응하여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제는 청주와 조치원 등지의...
-
일제의 강점에 분개하여 스스로 자결한 애국지사. 유생으로서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현실에 통분하여 죽음으로써 항의하기로 결심하고, 이 해 10월 27일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결국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충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
-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충남 목천(木川) 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 등 한인 단체를 조직하여 재만 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
비밀결사 다혁당에 참여하여 학생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 대봉정(大鳳町) 소재 유흥수(柳興洙)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학생 비밀결사인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앞서 결성되었던 동교의 항일학생조직인 문예부(文藝部)와 연구회(硏究會)를 계승·발전시켜 조직을...
-
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1907년 의병투쟁에 나선 이후 1910년 5월 일제에 피체될 때까지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강원지역 등 광범한 지역을 무대로 20여회에 걸쳐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부지방의 후기 의병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봉수(韓鳳洙)[1883~1972]는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
-
서로군정서 의용대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독립운동가.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원(義勇隊員)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1922년 5월 16일 평북 강계(江界) 벌등진(伐登鎭)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