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928
한자 梁在興
영어공식명칭 Yang Jaeheung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5월 2일연표보기 - 양재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양재흥 서천군 마산면에서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0월 9일 - 양재흥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59년 2월 5일연표보기 - 양재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양재흥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출생지 가화리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독립유공자 1묘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양재흥(梁在興)[1884~1959]은 1884년 5월 2일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하여 일으킨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29일 오후 1시경 송기면의 주도로 신장리 장터에 모인 2,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고 있을 때 일제 경찰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劉性烈) 등 6명을 강제 연행하였다.

양재흥은 고시상(高時相)·김인두(金印斗)·박재엽(朴在燁) 등과 함께 시위 군중을 인솔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갔고, 창문의 유리를 깨고 기물을 부수면서 연행된 송기면 등을 구출하려다가 머리 부분에 총상을 입고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양재흥은 1919년 9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9년 2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

양재흥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양재흥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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