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86
한자 落花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3[쌍북리 678-2]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낙화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낙화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낙화암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낙화암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3[쌍북리 678-2]지도보기
성격 바위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에 있는 바위.

[개설]

낙화암(落花岩)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에 있다. 660년 7월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왕도 사비성(泗沘城)이 함락되고 백제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였다. 백제 왕궁에 있던 궁녀들은 적군에 항복하기보다 죽기로 마음먹고 부소산성의 북쪽 강변 바위에서 차례로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후대에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낙화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바뀌었다.

[위치]

낙화암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의 서쪽 백마강 가에 있다.

[형태]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으며,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낙화암 전설과 문학]

『삼국유사』 권2 「기이」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에는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에 닿았는데, 전하는 말로 의자왕이 여러 후궁과 함께 최후를 면치 못함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면서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속설이 잘못된 것이니, 단지 궁녀들은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다고 당나라 역사서에 분명히 써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백제고기』를 고려 초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같은 책으로 보기도 하는데, 인용된 설화는 백제 멸망 후 통일 신라 시대에 구전으로 전승된 설화를 고려 시대 초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타사암 설화는 고려 후기에 문학적 수식을 가미하여 재구성되었으며, 낙화암(落花巖)으로 이름이 바뀌어 1287년 편찬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하권 「백제기(百濟紀)」에 실렸다. “나라를 유지한 지 오래되어 의자왕에 이르니 여색에 취하고 음악에 흥겨워 왕의 법도를 잃었도다. (중략) 수많은 궁녀들이 청류에 몸을 던지니 낙화암대왕포에 솟아 있구나. 포구는 왕이 항상 놀았으므로 얻은 이름이며, 바위는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으므로 얻은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낙화암은 본래 당나라 현종(玄宗)이 삼천 궁녀와 환락에 젖어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것을 비판한 백거이(白居易)의 시구에서 빌려 온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말에는 백제의 왕도였던 부여군이 시인 묵객들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충청남도 서천 출신의 유학자 이곡(李穀)은 「주행기(舟行記)」라는 기행문에서 낙화암·조룡대(釣龍臺)·호암(虎巖)·천정대(天政臺)를 시 짓기 좋은 대표적인 장소로 꼽았으며,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에서는 “누대 궁궐 사치로 화려하도다. 하루아침 금성탕지 와해되더니 철길 높은 바위 이름 낙화로구나”라고 읊었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존오(李存吾)도 「석탄행(石灘行)」이라는 회고시에서 의자왕이 두 손이 묶인 채로 당에 끌려간 옛일을 회고하면서 ‘낙화봉(落花峯)’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고려 말의 회고시 영향을 받아 조선 시대에는 더 많은 문인들이 낙화암을 소재로 삼아 회고시를 지었다. 1433년 10월 28일에는 세종(世宗)이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은 술 때문이니 주자소(鑄字所)가 술의 폐해와 훈계를 담은 글을 인쇄하여 반포하라고 교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흔(金訢)은 1484년 암행어사로 부여를 순찰하였는데, 의자왕이 음탕한 쾌락에 빠져 성충과 같은 충신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하였으며 삼천 궁녀가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다는 내용의 「낙화암」이라는 회고시를 지었다. 여기서 처음 표현된 ‘삼천 궁녀’는 ‘많은 궁녀’라는 뜻으로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장한가(長恨歌)」에서 쓴 표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전기 문신 조위(曺偉), 민제인(閔齊仁) 등이 지은 시부(詩賦)에도 삼천 궁녀가 나온다.

낙화암은 조선 시대에 빼어난 경치를 통하여 역설적으로 국가 멸망의 한을 강조하며 훈계하려는 역사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삼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린 사례는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부녀자의 정절을 강조하고 교화시키는 데 좋은 소재로 활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낙화암 전설]

일제 강점기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부여고적보존회 백제관 관장으로서 부여를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대표적 공간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오사카 긴타로가 1934년 발간한 『백제 구도 부여 고적 명승 안내기』라는 관광 홍보 책자에서 백제가 멸망할 때 사비성에 거주하고 있던 다수의 일본인 부인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제인들과 함께 낙화암에서 투신하였다는 이야기를 첨가하였다.

일제 강점기 백제 멸망을 다룬 역사극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1933년 금릉인의 「낙화암」, 1936년 임선규의 「사비수와 낙화암」, 1940년 김용승의 「백제와 낙화암」과 함세덕의 「낙화암」 등이 있다. 1941년 김동인이 『매일신보』에 연재한 「백마강」, 1942년 김정구의 노래 「낙화삼천」에도 낙화암이 주요 소재로 쓰였다.

[의의와 평가]

낙화암은 백제 멸망 당시 회한과 비탄의 정서를 담은 낙화암의 전설을 되새길 수 있는 곳으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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