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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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柳誠源
영어음역 Ryu Seongwon
이칭/별칭 태초(太初),낭간(琅玕),충경공((忠景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유봉희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琅玕)이다. 사인(舍人) 유사근(柳士根)의 아들이며 조부는 한성부판윤 유호(柳滸)이다. 연균(緣筠) 유계분(柳桂芬)이 큰 조카이다.

[활동사항]
유성원은 144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3년 후에는 문과 중시에 합격, 집현전 학사를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경(司經)·수찬(修撰)·시교(侍敎) 등을 역임하였고, 1453년에는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는 데 공을 세워 성삼문 등과 함께 상급(賞給)과 관자(官資)를 받았다.

1453년에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전권을 쥐게 되었는데, 백관(百官)이 수양대군의 공에 대해 집현전으로 하여금 교서를 초안하게 하자 홀로 남아 있다가 협박을 받아 초안하고는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다. 그 후 성삼문·박팽년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1452년 일이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때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있었는데 여러 선비들이 성삼문의 일을 고하니 곧 집에 돌아와 아내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사당으로 올라갔다.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아내가 올라가보니 관대를 벗지 않고 반듯이 누워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조금 후 관청에서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시신의 찢김을 당하였다.

[학문과 사상]
저작랑(著作郞)으로 『의방유취』를 편찬하였고 집현전 학사로서 학문에 조예가 깊어 사가독서(賜暇讀書)에도 뽑혔으며, 『역대병요』 편찬에도 관여하는 등 여러 학문에 통달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단종 복위가 누설되자 자결한 지조 있는 선비였다.

[저술 및 작품]
유성원의 시조(時調) 한 수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경(忠景)이며, 1691년(숙종 17)에 복관(復官)되고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902년에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현재 과천의 민절사(愍節祠), 연산의 팔현서원(八賢書院), 홍주의 녹운서원(綠雲書院),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학산 충렬사(鶴山 忠烈祠),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서 제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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